내가 경험한 가장 따뜻한 사랑
4월이면 동네의 분홍색이 많아졌다. 가파른 골목길 끝자락에, 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동네 슈퍼 옆에, 노란 스쿨버스가 정차하던 넓은 주차장에는 벚꽃나무가 있었다. 마을 가장 윗골목에 있는 우리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4월에는 싫지 않았다. 나는 퀘스트를 깨는 것마냥, 동네에 핀 벚꽃들을 하나씩 구경하면서 올라갔다. 25살의 내가 벚꽃을 가장 좋아하고, 4월이면 매일 설레는 이유는 아마 이 추억때문일 거다.
그렇게 분홍색을 즐기다보면, 늘 방울이와 할아버지를 만났다. 왜 아직도 안 오냐며 내가 걱정이 된 할아버지는 늘 나를 찾으러 내려오셨다. 마냥 신나하는 손녀를 보고 할아버지는 늘 웃으셨다.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방울이의 목줄을 잡으며 두런두런 집으로 향할 때면,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이게 첫 기억이다. 할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추억.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일은 할아버지가 용돈을 주시던 오후다. 할아버지는 종종 오빠 몰래 나한테만 용돈을 주셨다. 동네 초입에 있던 작은 피아노 학원에 가기 전, 할아버지는 나를 몰래 부르셨다. 그리고 1000원, 3000원, 가끔은 만 원. 나는 생각했다. '오빠한테 들키면 안되는데.' '어떻게 안 잃어버리지?'
나는 지폐를 접어 양말 뒷쪽에 넣었다. 지갑은 없고, 주머니에 넣으면 잃어버릴 것 같으니 양말 안에 넣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한 번도 비웃지 않으셨다. 오히려 머리를 꾹 눌러주시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는 늘 머리를 누르셨다. 나는 그게 좋았다.
그 다음 생각나는 기억은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할아버지에게 못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대자로 누워 TV를 보고 있던 내게, 할아버지는 대문 좀 닫고 오라고 하셨다. 거실에서 대문까지는 15초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 날따라 나는 귀찮았던건지, 그말을 모른 체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대문 좀 닫고 와라" 나는 세차게 일어나고, 혼자 중얼거리며 슬리퍼를 신었다.
"할아버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 때로 돌아가고 싶다. 어린 나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대체 왜 그랬어? 엄마가 나를 혼내면, 나를 품에 안아주며 왜 애를 혼내냐고 도리어 엄마를 나무랐던 할아버지다. 그런 할아버지도 이 때는 나를 혼내셨다. 혼날 만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고, 포장된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좋았던 기억은 그 때도 소중했고, 행복했다. 나쁜 기억은 미화되지 않고, 점점 선명해진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리움, 행복 그리고 죄책감이 동시에 몰아친다. 갑자기 이 글을 쓴 이유는 그냥 할아버지가 보고싶어져서다. 개요도, 퇴고도 없이 갑자기 할아버지가 보고싶어서 줄줄 써내려간 글이다.
할아버지는 엄마 꿈에도 한 번밖에 안 찾아왔다. 많은 손녀,손자들 중에서 나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그 때 화를 낸게 아직도 서운하신가보다. 할아버지는 10년이 넘도록 내 꿈에는 한 번도 안 오셨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할아버지가 꿈에 찾아와줬으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