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마치는 이에겐 과한 위로가 필요하다
제주도 한 달 살기 마지막 날 저녁, 친구와 전화 통화를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로비에 앉아 일기를 썼고, 영화 <안경>을 보았고, 숙소의 다른 분들과 함께 가벼운 저녁을 먹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할당된 시간을 다 떠나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가능하다면 더 있다가 가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친구가 말했다. 아쉽겠지만 잘 돌아오라고 서울에서 보자고.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위로가 좀 되었어?"
"위로? 아니. 부족해!"
"부족해? 과한 위로가 필요하구나? 나는 그런 건 잘 못하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는 누구보다 감정적인 사람이고 친구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한 사건에서 갖는 감정의 크기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난 감정적이니 공감에 특화된 사람이었고, 친구는 공감보다는 해결방안에 특화되어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이들보다 감정이 삶에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때로는 남들보다 공감을 잘한다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나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달랐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오빠는 본인의 모든 감정을 쏟아냈고 나는 일단 속으로 삭히는 것이 먼저였다. 감정을 쏟아낸 오빠는 시원한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감정에서 벗어났지만 나는 꽤 긴 시간을 이전에 발생한 사건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보살펴야 했다. 심지어 사고를 친 사람은 오빠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하여금 걱정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나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오빠는 가볍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고, 부모님은 나에게 전화해 하소연하는 것이 우리 집의 룰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의 감정에 공감하다가 마치 그것이 내 감정 인양 마음속에 쌓아 두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상황이 너무나 억울해서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좀 속상해. 오빠처럼 살고 싶어 막 감정을 쏟아내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확 털어버리고 싶어. 다른 사람한테 공감하기도 싫고."
"그게 네 장점인데 없으면 안 되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다들 너랑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건데. 우리 딸이랑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엄마의 말은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지만, 마음이 온전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그럼 난 누구한테 위로받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나눈 것들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돌려받지 못한다면 주고 싶지도 않은 유치한 기분마저 들었다. 타인의 감정을 공감해서 위로해 주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타인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리면 그것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를 갉아먹는 장점이라니 허울만 좋은 선물 같았다. 아주 묵직하고 커다란 선물. 그 포장지가 너무 고급스럽고 아름다워서 다들 손뼉 쳐줄 만한 선물이 내 품에 있다. 그 선물을 열어보니 쓰레기만 한가득 담겨있는 듯한 기분, 혼자 남아 그것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그런 일들이 계속되어 지쳐만 가는 기분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나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타인의 행동과 말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것에서라도 그 부족함을 채워야 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위로받았다. 그래서 삶의 상당 부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보내지만, 이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단점이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을 떠나보내 슬퍼진 순간 즉각적인 위로를 받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 날, 잠을 자러 방으로 가기 전에 로비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말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서울에."
"마지막 날이라니 너무 슬프네요. 울어주실래요?"
울어달라니 이보다 더 과한 위로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울어달라는 부탁은 나의 말버릇이었다. 친구가 잠시 기다리고 내가 어딘가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잘 기다리고 있어."
실제로 그 짧은 순간 내가 없다고 울 턱은 없지만 많은 순간 그런 식으로 말해왔다. 그런 말을 한다고 과한 위로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위안을 받았던 적은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와 너 1초만 늦었어도 나 울뻔했다. 잘 왔네."
그 순간 웃음이 피어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푸하하 하고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 날 울어달라는 나의 황당한 요구에 로비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하고 소리를 냈다. 어깨도 들썩이며 우는 척을 해줬다.
울 뻔했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을 들은 순간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때로는 위로란 것이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공감하고 따뜻한 단어들을 내뱉는 것 대신에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될 수 있었다. 나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들도 타인을 위로하고 살아갔던 걸지도 몰랐다. 그제야 억울한 마음이 수그러 들었다.
나의 방식과 너의 방식이 같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하기도 위로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과한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 다면 언제든 나에게 찾아오라고 말하고 싶다. 감정 과다형인 나는 언제든 당신을 위해 울어줄 준비가 되어있으니.
"엉엉"
2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