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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x Oct 05. 2023

영화 제목 바꾸기와 동시통역사의 꿈

때는 바야흐로 2000년, 소심한 청년 K는 꿈에 그리던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약속하기에 이른다. 예매를 하기 위해 극장 앞에선 청년 K.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를 되뇌며 '단적비연수 두 장이요, 단적비연수 두 장이요'를 연습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윽고 청년의 차례. 침을 꿀떡 삼킨 청년 K가 용감하게 말했다.

"단양적성비 두 장이요!"


소심 청년 K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청년은 중년이 되었다.

그의 장모님, 아이들의 외할머니이자 아내의 친정 엄마는 여러 가지로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그중에서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단어를 엉뚱한 단어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으뜸이었다.

"아야, 그 요 앞에 그 병원, 그 이름이 뭐더라. 이만기던가?"라고 물으면, 처가의 6남매 모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중년 K의 아내이자 장모의 큰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엄마, 이만기 아니고 노민관 의원 아냐?"

그러면 모두들 수긍의 고개 끄덕임이 일렁인 뒤, 다음 이야기로 이어졌다.


또 한 번은 드라마 이야기를 하던 장모가 "그 뭐냐, 그 얄쌍한 남자 애 나오는, 그 제목이 뭐더라... 얼룩개 뭐 어쩌고 하던데..."하고 운을 떼니 가만히 듣고 있던 K의 아내가 "발바리의 추억?"이라고 하자 장모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어릴 적 동시통역사가 꿈이었다던 K의 아내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동시통역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극장가는 여름 대목을 앞두고 새로운 영화가 하나둘씩 개봉을 하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이면 해외 대형 블록버스터를 개봉하곤 했는데, 넷플릭스 등의 영향인지 그런 영화는 줄어들었고 국내 영화가 한꺼번에 몇 편이 출시되었다. 류승완 감독의 밀수 등 여러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어느 날 K의 아내가 "이번에 나온 영화 중에 그 뭐더라, 이병헌 나오는 거 재밌다던데... 제목이 뭐더라..."

제목 바꿔 부르기의 달인인 장모의 큰딸답게 어떤 제목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데 이윽고 아내가 말했다.

"아, 맞다, 아스팔트 오아시스."

그러자 새로운 동시통역사의 등장. 작은 아들이 말했다.

"엄마, 아스팔트 오아시스 아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니에요?"


피는 물보다 진하고 역사는 흐른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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