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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차 Jan 07. 2024

그냥 걷는 중

책방을 오픈한 지 반 년이 지났습니다.

책방을 오픈한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습니다. 얼떨결에 하게 됐지만 마치 이것이 오랜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작은 책방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제 삶의 비어있던 곳을 조금씩 채워주는 중이거든요. 허전하던 곳에 무언가 들어차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사실은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한 번 해볼까 하고 가볍게 시작한 일이면서 말이죠.


처음에는 정답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답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정답이 너무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아서 오래 헤맸어요. 공간을 꾸리기에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죠. 저의 취향대로 꾸며진 이 곳을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고(망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여러 종류의 좌절이 매일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몇 달 동안 그런 날들을 보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책방 문을 닫고 어딘가 먼 곳에 숨어 버리고 싶어질 때면 최초의 다짐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어디로든 그냥 걷자, 걸어 보자, 라는 다짐이었어요.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늘 의심하며 걷고 자주 뒤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돌아갈 수도 있고 목적지 떠윈 없어도 괜찮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확신을 갖고 신중하게 걷고 싶어했죠. 그렇지만 책방 만큼은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니까, 뭔가 잘못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도 그저 매일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시간이 되면 닫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결심을 할 때가 올 거라고요.

다만, 해보고 싶었던 것은 마음껏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대로 모임을 만들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꼭 한 분 이상은 모임에 신청해 주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주실 때마다 사실은 이렇게 묻고 싶었어요. "왜... 도대체 왜 신청하신거죠?"


그러다보니 6개월이 훌쩍 지나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 오셔도 당황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셔도 어떤 대답이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단골 손님이 제법 늘어서, 책방에 들어오시는 분께 "어서오세요"가 아닌 "어머, 오셨어요?" 라고 인사할 때가 많아졌습니다. 책방을 운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를 좋아해 주시다니, 정성껏 편지를 쓰고 작은 선물을 건네 주시다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책방이라고 하면 누구나 따뜻한 공간을 상상하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따뜻한 사람이 아닌데.. 하고 부담스러워질 때가 종종 있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전해 주시는 다정한 마음 때문에 제 마음이, 이 공간이 훈훈하게 데펴질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금요일과 일요일 아침에 그림 모임과 독서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 목요일 저녁에는 어떤 가족이 책방에 와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얼마 전에 '일요 작업실'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자 분들이 자유롭게 작업하고 서로의 작업 과정을 공유하는 모임을 모집했어요. 그냥 누군가 꾸준히 오셔서 작업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모임인데 무려 아홉 분이나 신청하셔서 빽빽하게 앉아서 함께 작업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모임이 너무 많은가.. 싶지만 독립출판 클래스도 곧 모집을 시작해야 해요. 버거우니 조금 더 쉬어갈까 했지만, 두 분께서 대체 언제 올라 오느냐고 재촉하셔서, 이제 다시 바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어디로든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처음보다는 조금 더 걸을만해졌습니다. 이쪽으로 이렇게 걸으면 되려나.. 아니라면 다른 쪽으로 다르게 걸으면 되겠지, 싶어요. 걸음에 자신감이 좀 붙었다면, 그것은 잘하고 있다,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일 겁니다. 책방을 연 덕분에 경험한 것들이 있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더라도 그곳에는 예전과 달라진 제가 있겠지요. 그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냥' 걸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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