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여유에서 나오는 것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나는 내가 멘탈이 튼튼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잘 깨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회복력이 좋기 때문이다. 사실 멘탈 자체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와르르 무너질 때가 있다. 이번 주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발단은 카드 회사에서 걸려온 치아 보험 권유 전화였다. 보통 그런 류의 광고 전화는 바로 끊곤 했지만, 상담원의 조금만 더 들어보라는 말에 붙잡혔다. 마침 슬슬 치과에 가보려 했기에 보험을 가입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류의 광고 전화는 받기만 하는 걸로도 괜히 불쾌해지곤 한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불쑥 걸려온 것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가입을 권유하는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몇 번 더 캐묻다가, 결국은 가입하기로 했다. 그러자 보험 약관을 전부 듣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통화가 예상치 못하게 더 길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언짢은 기색이 묻어 있는 내 목소리에 그분이 대답하셨다. 고객님, 제가 숨도 안 쉬고 읽어드릴게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나는 대체 왜 짜증을 낸 건가? 그분은 내게 보험을 추천했고, 나는 내 판단으로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듣기 싫었으면 진작 끊었으면 되는 일인데, 내 필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왜 내 시간을 침범당한 것처럼 느껴서 애꿎은 전화기 너머 상담원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을까. 왜 그분이 내 눈치를 보면서 쩔쩔매도록 갑질을 했을까. 뒤늦게 황급히 아니라고, 천천히 해주셔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분은 서둘러 절차를 끝내고 고맙다는 인사로 전화를 마무리하셨다. 나는 죄송한 마음을 담아서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말을 간신히 덧붙였다.
그 통화가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 또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안 좋았는데도 열심히 대답하고 가입해줘서 감사한 마음에 기프티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게 아니라 그냥 무의식 중에 갑질을 한 건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감사하다는 말로 나를 달래줄 수 없을 그분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평소에 나랑 접촉하는 사람들이 기분 좋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내가 추구하던 되고 싶은 나 자신과 나의 본성이 상이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후회와 죄송함과 막막함이 섞여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난 한 달간의 발리 여행 중에도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있다. 돈과 시간의 제약 없이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내던 나는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 시간에 쫓기는 일들이 생겼다. 하루는 예약해 둔 방탈출 시간이 임박했는데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왔다. 초조하던 차에 화장실을 갔는데 직원이 안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내 기준 꽤 기다렸는데도 인기척이 없었다.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노크를 했다. 그럼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또 기다리다가 또 노크를 했다. 잠시 뒤 안에 있던 백인 아저씨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화를 냈다. 안에 사람 있는 거 알면서 왜 노크를 한 거니? 그 질문을 듣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왜 노크를 한 걸까? 내가 기다리는 걸 알려주려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려고? 어련히 자기가 볼일 다 끝나면 나올 텐데 굳이 재촉한 것은 그냥 나의 초조한 마음을 애꿎은 데에 푼 것뿐이다.
사실 나는 그 모든 순간에 간과했다. 지금 나의 행동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괜히 서로 기분만 나빠지게 만드는 행동이라는 것을. 조금만 차분히 생각했으면 깨달았을 텐데, 그 순간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당장 나의 짜증을 못 견디고 당장 상대에게 쏟아부었다.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이유는 시간에 쪼들려서고, 시간에 쪼들렸던 이유는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다. 나는 태생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짧은 시간에 이 일련의 사고과정을 거쳐서 성숙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이렇게 두고두고 후회가 사무치게 되었다.
지인을 만나 대화를 하다가 그분이 얼마 전 홍보를 통해 알게 된 서비스가 만족스럽다며 추천해 주셨다. 나도 똑같은 홍보 문자를 받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단지 스팸문자로 여겨서 불편하게 받아들였었다. 그런 선입견 없이 서비스를 잘 이용하고 있는 게 참 좋아 보인다는 내 말에, 그분은 본인도 콜드메일을 많이 보내봐서 그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셨다. 혹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문자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지,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한 심정이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면 그런 모든 접촉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그분의 말에, 그 뒤에 있을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의 불편함만 생각했던 내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이번 주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나는 나에게 연락한 그 심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내 말에 그분은 이런 경험을 통해 배려를 조금 늘려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다.
물론 나는 깨닫고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시금 되새겨본다. 짜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짜증을 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분을 상하게 만들 뿐이다. 그걸 알고 있지만 지키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사실을 되새길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게으르게 굴지 말자.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 나만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마음을 다잡지만, 이 반성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그분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