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미래는 여기에 없어요
병가를 쓰고 돌아온 지 한 달째
회사에 복직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부서에서 다른 분이 또 병가를 떠나셨다. 그분의 마지막 근무날, 나와 업무 관련 메신저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분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소연, 저 그런데 소연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은가요?”
병가 쓰고 쉬면 좀 괜찮아지나요? 다시 돌아오니 어떤가요?... 그분은 쉬러 떠나면서 돌아올 게 걱정되어서 나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하셨다. 내가 자신의 복직 후 근미래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나는 한참을 키보드 위에서 말을 고르고 골랐다. 나 지금 어떻지? 돌아와서 나의 지난 한 달은 어땠지? 마치 전생처럼 느껴지는 지난 세 달의 휴직과 발리에서의 여름을 뒤로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는 그전과 비교해서 괜찮아진 걸까? 나의 휴식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회사로 돌아와서 빠르게 업무에 복귀했지만, 요즘 나는 매 순간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파트장님과 조장님은 나를 배려해서 내게 아직 많은 업무를 할당하지 않았지만, 전원이 바쁜 우리 부서에서 나만 비교적 여유로운 상태라는 게 나에게 또 다른 불편함을 주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내가 할 일들을 적당히 찾아서 하고 있다.
차주부터 FDA 실사가 계획된 탓에 전사적으로 아주 난리인 요즘은 특히 바쁜 시기이다. 나에게도 주로 FDA 대비 업무들이 주어졌는데, 각 시험자들에게 업무를 나눠주고 진행상황을 점검해서 보고해야 했다. 파트장님은 본인 대신 내게 후배들을 쪼는 임무를 맡기신 거다. 그런데 나는 파트장님이 정해준 기한까지 그 일들을 완료하라고 독촉하지 못했다. 이번 주 내로 해달라는 내 말에, 옆자리 후배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주말에 출근해서 완료해도 될까요? 이번 주 내내 제가 거의 밤 12시에 퇴근하고 있어서, 도저히 이것까지는 못할 것 같아요….”
파트장님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하기를 바라셨을까. 주말에 출근해서라도 정해진 기한을 지키라고 강요하길 바라셨을까? 물론 정말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래야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더 여유가 있는 일이었다. 굳이 사람들을 몰아세워서 꼭 그 주까지 끝내야 할 필요는 없는. 아마 파트장님도 지연될 것을 고려해서 기한을 짧게 잡으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월요일까지 해달라고 하고는 그분이 맡은 업무를 좀 도와주었다.
그다음 업무는 차라리 분배하지 않고 나 혼자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부서의 승인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언제까지 부탁드린다는 내 말에, 그분들은 알겠다고 하였으나 요청한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다. 몇 번 메신저로 독촉하고 직접 자리로 찾아간 적도 있으나, 그때마다 그분들이 처리해야 할 문서더미가 쌓여있는 게 보여서 더 강하게 요구할 수 없었다. 오늘 밤에 해드릴게요, 새벽에 해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야근하며 퀭한 눈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거기다 대고 할 말이 없었다. 모두 각자가 가장 급하다고 들이닥치는 업무 사이에서 우선순위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갈려나가는 그 기분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파트장님의 독촉을 씹으며 내가 생각하는 마지노선까지 기한을 연장했다.
파트장님은 그런 나한테 속이 터지셨다. 그러면서도 나한테 조심스러운 편이라 강하게 압박하지는 못하셨다.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이번 주 금요일, 실험실을 정리하다가 파트장님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업무 진행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기를 바라는 파트장님과 필요한 순간에 업무가 완수되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 윗사람이 시키는 것에 반발하지 않고 따르는 파트장님과 내가 생각하기에 납득이 되지 않으면 따르지 못하는 나. 일을 시켜야 하는 파트장님과 더 이상 힘들 정도로 일을 안 하려는 나. 내가 힘든 만큼 파트장님도 나를 다루는 일이 힘드실 거라는 생각에, 그러면서도 나를 배려해 주시는 모습에 죄송함이 솟구쳤다. 파트장님은 쭈굴한 나를 보고 늘 그렇듯 “으이그” 하셨고, 그제야 그간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파트장님, 저는 진짜 나중에 매니저는 못될 것 같아요…”
부서 매니저의 역량은 한정된 인원으로 주어진 일들을 시간 내에 쳐내야 하는 거겠지. 특히 이런 대기업의 바쁜 부서에서는 더더욱 개인의 징징거림을 들어줄 수 없는 거겠지. 야근과 주말 출근을 잘 강요할 수 있는 게 회사가 바라는 조직의 리더인 걸까, 내가 여기서 더 직급이 높아지면 나도 파트장처럼 무리한 업무량을 강요해야 할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확실히 여기서 나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가를 쓰고 쉬면서 괜찮아졌냐는 그분의 질문에 나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만약 여기서 일하는 게 괜찮아졌냐고 물으신다면, 완전 아니에요. 오히려 더 괴롭게 느껴져요. 제가 안 맞는 사람이라는 것만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걸 명확히 알게 된 게 성과라고 생각해요. 회사 일을 떠나서 제 삶을 생각했을 때는 확실히 쉬고 나서 더 괜찮아졌어요. 그러니까 00님도 모쪼록 그냥 맘 편히 푹 쉬고 오세요….”
확신을 얻은 덕분에 복직 후 지난 내 한 달은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고 면담하면서 나름 바빴다. 병가를 쓰기 전 나는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내가 여기서 도태될 사람이라는 공포와 불안을 느끼곤 했다. 그게 다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공포가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오더라도, 이내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한다. 내가 부족한 게 아니야. 나의 리더십은 무조건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리더십이야. 나랑 맞는 데가 분명 있을 거야. 그렇게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다독이며, 지금의 이 불편한 시간들을 흘려보내자. 곧 지나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