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인간>오늘도 내 목덜미를 노리는 자들이여
오늘도 조용하고 고독한 휴일을 즐기기 위해 각을 잡고 늦게 일어나 책 몇 권을 들고 단지 내 북카페로 향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료로 제공되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책을 펴려는 찰나, 오늘도 역시나 쓸모없는 인간들의 쓸데없는 연락과 간섭은 내 내면의 평화를 깨뜨리고 뇌 속에 책 내용을 입력하는 대신 이렇게 배설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어딜 가도 피할 수가 없기에 항상 적당히 넘겨왔고 물론 간간히 짧은 의사표현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반드시 휴일을 반납하고 긴 글을 쓰리라 마음먹는다. 난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덕분에 당신들이 이 글을 읽을 거라는 것 또한 알거든.
누누이 얘기하지만 난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타인이 내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걸 질색팔색 하며 팀플레이, 친목질, 오지랖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다. 병원 진료 또는 마사지나 네일아트 같은 미용시술은 물론 제외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는 상대 이외의 타인과 신체접촉을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물론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더라도 내가 판단했을 때 그래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사적 영역인 물리적 거리 1미터 이내로 들어오는 걸 혐오한다. 심지어는 대화의 필요성도 잘 모른다. 내가 관심 있는 타인은 오로지 나의 연애 상대, 그러니까 (지속적인)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맺을 예정이거나 맺고 싶은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그 외의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건 아마 앞서 말한 행위에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나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거다. 물론 항상 내 성향에 맞는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나 자신을 찾아가면서 분명하게 깨닫게 된 사실이다. 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간단한 대화는 전화나 메신저로 하고 끈끈한 유대감 보단 사생활을 존중하는, 여느 가정에 비해 개인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란 이유도 있지만 나라는 사람이 기질적으로도 외부 자극에 굉장히 예민하며 외부세계보단 내부에서 에너지를 얻는 내향형 인간이기 때문이라 본다.
“이번 주말에 뭐하세요?”
“북카페에서 독서하려고요.”
“뭐하세요?”
“술 마십니다.”
“같이 마셔요.”
“제가 프로 솔플러라 혼술을 선호합니다.”
“왜 계약직 안 하세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 지금 (장소)에 있어요.”
“그래요?”
대체 어쩌라는 거지? 이쯤 되면 “아 네.”라는 답장들이 그렇게 받고 싶은 건지 궁금해진다. 최소한의 공감능력과 배려심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상대가 단답으로 대답하거나 표정이 좋지 않으면 그쯤에서 의중을 대충 파악하고 더 이상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연락을 해도 답을 하지 않고 거절하고 다가오면 피하고 뒷걸음질을 치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다가오거나 연락하거나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노출하거나 심지어는 피할수록 오기라도 생기는 건지 오히려 더 들이대는 사람들은 과연 모르고 그러는 걸까?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계속 이런 식으로 혼자 나가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강하게 거절하면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그러냐느니 어장관리가 아니냐느니 어쩌니 하는 말로 뒷목을 잡게 만든다는 점이다. 참 나, 대체 이보다 더한 거절 신호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잘 생각해보길. 분명 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그저 당신의 개인적 행복 회로 또는 단순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만들었을 뿐. 그런데 왜 당신의 망상을 내가 책임져야 하나. 특히나 직장 동료라거나 상사라거나 일적으로 얽혀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 하다. 나와 상대는 물론이고 같이 얽힌 다른 사람들마저 아주 불편해질 수 있는 일이라 적당히 선 지키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왜 스스로 먼저 파악을 못하나? 어쩌면 보통의 한국인의 특징일 수 있는 이러한 배려심 없고 섬세하지 못한 막무가내 근성에 진절머리가 난다.
“안 도와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웃음) “지금 바쁘지 않으니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쪽으로 안 오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그제야 상대는 “난 네가 힘들까 봐..” “너 생각해서 그런 건데 왜 화를..?” 등의 반응을 보인다. (반말부터 이미 불쾌하지만) 정말 “내가 힘들고 안 힘들고를 왜 그쪽이 정하죠?” “제 생각하지 마세요 제발.”이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앞서 말한 ‘그래야 할 필요가 1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사적 영역인 물리적 거리 1미터 이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내 가치관으로 판단했을 땐 쓸모없지만 분명 상대방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 필요란 정서적인 것이며 나로 하여금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나는 직장일이나 금전거래 등 필요한 상황에서 두 사람 이상이 공동작업을 한다거나 상대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잘 보이지 않는 등의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거리 좁히기에 전혀 불만이 없다. 이건 아무리 봐도 상대나 나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서적인 이유라면 얘기가 아주 달라진다. 정말 친밀한 관계가 아닌 이상 단순히 추측을 할 뿐 상대의 내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남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가 상대에게 정서적으로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소통일 뿐이다. (물론 가끔 정말 배려심이 깊고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섬세한 사람은 타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짚어내서 행동하는 초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감동을 자아내지만)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왜 남이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현대 인류 일반, 특히 외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상대가 아닌 오로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만 의거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좀 더 폭넓은 사고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연약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마치 구원자라도 된 듯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대개 복합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 즉, 남을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남을 지배하려는 우월감도 가지고 있다.” - <인간관계의 법칙(The Art Of Seduction)>,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1998 -
동물의 세계에선 다른 개체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목숨을 거는 행위라는 걸 서로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다른 개체가 눈만 쳐다봐도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다. 호모 사피엔스도 결국 포유동물일 뿐인데 왜 유독 인간 세계에서만 그러한 영역 침범이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나는 언제나 의문이다. ‘에디슨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의 저자 톰 하트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사회가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한 것이 그 이유라 설명했다. 쉽게 말해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솔플보다는 팀플이 생존에 유리해짐에 따라 예민하고 내향적인(마치 고양잇과 동물 같은)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는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을 사냥꾼의 유전자를 가졌다고 표현했다. 그렇다. 영역이 확실하고 무리 생활을 싫어하며 단독 사냥을 하는 고독한 프로 솔플러 육식동물,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어떤 동물이건 같은 종족과만 교미한다는 걸,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사냥하며 살아간다는 걸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으로는 과일향 그득한 연태에 하얀 와일드 램(어린양 ㅅ발아)을 먹어야지.
“남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개떼들은 남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고양이 한 마리를 절대 이길 수 없다.” -Philosophy Jung, 1987~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