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깝게 지내온 동생 녀석은 집사다. 이른바 ‘고양이 집사’. 그는 새까맣고 눈이 예쁜 고양이와 함께 산다.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이따금 약을 먹으면서도 벌써 10년 가까이 그래왔다. 동생은 내게도 고양이와 살아볼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응. 생각해볼게.
그 대답을 다섯 번 정도 했을 때였나? 녀석이 딱 잘라 물었다.
형. 실은 고양이 키울 생각이 없는 거죠?
그랬다. 어릴 적에는 동물을 유난히 싫어하시는 엄마 때문에 한 번도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다. 독립한 후에는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 일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마뜩잖았다. 거기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 계약서에는 볼드체로 “반려동물 금지”가 적혀 있었으니 나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마음앓이를 심하게 하던 무렵, 동생은 한 번 더 고양이 키우기를 권했다. 선뜻 대답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쐐기를 박았다.
형.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키우고 싶다고 했죠?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 케어 못하면서
사람을 어떻게 키워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 해 겨울, 고양이를 알아보러 이 곳 저곳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가정에서 생후 두 달된 페르시안 친칠라를 분양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털이 하얀 그 녀석의 이름은 ‘밀크’. 함께 놀던 누나 고양이한테 한 대 얻어맞고도 아무 말 못 하는 순둥순둥 한 모습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우린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천호역 롯데리아 2층에서 처음 만났다. 생애 첫 바깥 구경에 잔뜩 긴장했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던 녀석에게 나는 밀크 대신 ‘궁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른바 '천궁'이라고 불리는 하얀 꽃 궁궁이의 꽃말은 ‘고결'이다. 녀석이 고양이답게 그저 건강하고 고결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궁궁이가 첫 반려동물이었던 나의 육묘일기는 온통 실수투성이였다. 가뜩이나 털이 긴 페르시안인데 제때 빗어주지 않아 양쪽 귀 뒤에 털이 크게 뭉쳤었다. 솜씨 좋은 수의사 선생님이 잘라주기 전까지 녀석은 꽤나 무거운 귀걸이를 달고 사는 기분이었을 거다. 발톱을 깎다 너무 깊게 깎아서 피를 보기도 하고, 사료를 잘못 선택해 녀석의 작은 방광에 결석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녀석에게 미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럼에도 불고하고 궁궁이는 착한 고양이로 자라 주었다.
궁궁이는 이른바 ‘하악질(고양이가 ‘하악!’ 소리를 내며 경계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다. 낯선 사람을 봐도, 낯선 고양이를 봐도 그렇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다가가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머리를 삐죽 내민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다. 그러다 마음에 들면 그 사람 주변을 맴돌며 따라다닌다. 녀석은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특별히 더 끌렸던지, 한시가 바쁜 그의 다리에 몸을 감으며 반짝반짝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기가 찬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던 기사님이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고양이는 처음 봐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리도 살갑게 구는 모습에 조금 질투가 났지만, 내심 유순하게 자라준 것이 어찌나 기쁘던지. 그럼에도 요즘 인터넷에 무수히 등장하는 이른바 '개냥이(개처럼 살갑게 구는 고양이)'에 비하면, 안는 걸 아주 싫어하고 자신이 원치 않을 때 스킨십을 하면 얼른 도망가는 궁궁이는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특히나 어린 시절에는 내 배에 올라타는 걸 종종 즐기던 녀석이, 다 자란 후에는 고양이답게 데면데면하게 굴기 시작했고, 나는 '혹시...' 하며 가졌던 유튜브에 대한 기대를 일치감치 접었다.
지난 주말이었다. 오전 10시에 있을 랜선 모임을 앞두고 한참 집중해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때 도통 울릴 이유가 없는 초인종이 울렸다. 돌아보니 인터폰 화면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빠르게 사라졌다.
'뭐야. 요즘에도 벨튀(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꾸러기)가 있어?'
피식 웃고는 다시 글에 집중하려는데, 또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네. 오늘 소독 날이라서요.”
우리 아파트에서는 계절에 한 번씩, 집마다 화장실과 베란다 배수구에 소독약을 뿌려준다. 소독이 있기 며칠 전부터 엘리베이터 앞 게시판에 공지문을 붙여 두는데, 요즘 도통 집 밖으로 나가질 않으니 보질 못한 것이다. 얼른 문을 열어드렸더니 마스크를 쓴 아주머니께서 소독약을 손에 들고 들어오셨다. 아주머니가 현관에서 주섬 주섬 신발을 벗으시는데... 그때였다. 궁궁이가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를 켜며 머리를 쭉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주머니가 동그란 눈으로 궁궁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에요.
한 번만 쓰다듬어 주실래요?
아주머니께서는 그제야 까르르 웃으시고는 귀엽다며 연신 궁궁이를 쓰다듬어 주셨다. 녀석도 아주머니의 손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그녀 곁을 맴돌았다.
너무 귀엽네요.
고양이들은 보통 도망가는데 …
어느새 볼일을 마친 아주머니는 집을 나서기 전, 궁궁이가 눈에 밟혔는지 한 번 더 쓰다듬으셨다. 나는 주말 아침부터 고생하신다는 말과 함께 미처 냉장고에 넣지 못한 미지근한 음료수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소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말했다.
이 집은 고양이도 사람도
참 좋은 집이네요.
뜻밖의 칭찬에 나는 순간 어색해져서 쭈뼛쭈뼛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가 떠난 후 입주민 단톡 방에서는 마침 소독 때문에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 하필 코로나로 예민한 시기에 굳이 방문 소독을 해야만 하냐며 볼멘소리가 주를 이루었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주신 칭찬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인이 만인을 의심하고 투쟁하는 병든 시절. 그러고도 하필 주말 아침, 집집마다 돌아다녀야 하는 소독 아주머니는 누군가에게는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뻔히 있다고 대답을 하고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집에서는 마치 세균덩어리를 바라보듯 따가운 시선도 느꼈을 것이다. 일당을 받고 일하는 그녀에게 대뜸 소독 이유를 따져 묻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녀가 대문 밖을 나설 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이들도 존재했으리라.
그런 아주머니에게 쓰다듬어 달라며 먼저 머리를 내민 궁궁이였다.
순간 베란다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의 뒷모습이 참 예쁘고 또 대견했다.
그러고 보면 궁궁이는 참 착한 녀석이다.
이유 없이 울거나 떼를 쓰지 않는 궁궁이는 내가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고 있을 때는 잠자코 기다려준다. 비닐을 물어뜯거나 침대 커버를 할퀴어 뜯다가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 금방 멈추곤 했다. 결석이 재발할까 몇 달째 맛없는 사료를 주고 있지만 궁궁이는 투정을 하거나 거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 어쩌면 나는 '개냥이' 대신 ‘천사냥이’를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