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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Sep 05. 2020

너무 맑은 날에 떠난 K에게

수필


8월 내내 장마다 태풍이다, 심술을 부린 것이 미안해서였을까? 달이 바뀌자 여름은 금세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가을답게 9월 초순의 바람은 선선했고 적당히 따뜻했다. 오후 내내 포근한 햇살을 이불 삼아 베란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해 질 무렵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였다.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부고☆ 이 문자는 告 ○○○군의 동생분이 보냅니다. 저희 형님께서 금일 작고하였습니다. 장례식장 : 인천 XX병원”     


내용보다 부고 옆에 붙은 생뚱맞은 별표와 엉뚱한 고(告)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약한 장난 같아 그냥 지우려다, 다시금 읽었을 때 비로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은 오래전 함께 일했던 K였다. 





"소식 들었니?”

“네. 근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저도 못 본 지 오래되어서……”     


K의 오랜 친구였던 J마저 모른다면,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날 더 당황케 한 것은 J의 모호한 반응이었다. 몇 해 전, K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먼 곳에서 한달음에 찾아갔던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K에게 가는 것은 확답을 피했다. 


그동안 경조사를 가장 살뜰히 챙기던 N 역시 이번만큼은 갈 수 없노라 못을 박았다. 잇따른 집회로 코로나가 재확산되던 시기였으니, 최근 새 아이가 태어난 그로서는 조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게 둘을 빼고 나니 우리 중 K에게 갈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N이 통화 말미에 물었다.      


형은 당연히 안 갈 거지?


 그의 물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과 달리 K와 나는 서로 연락을 끊은 지 이미 십수 년째였기 때문이다. 그 세월 동안 우린 함께 알던 친구들의 여러 경조사에서도 마주친 일이 없었다. K의 근황은 이따금 J에게 전해 듣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모른다 한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전화번호를 오래전에 삭제한 나로서는, 내 번호가 그에게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지. 뭐.


N에게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뒤, K의 장례식장까지 거리를 검색했다. 무려 편도 두 시간 반, 왕복 다섯 시간 거리였다. 일행도 없이 혼자서 그 먼 곳까지 가야 할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로나마 적당히 추모하기로 마음먹었다. 블로그에 올리면 조회수가 꽤나 나올 것도 같았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나는 고향을 떠나 연고도 없던 경기도 화성에 전자부품 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함께 입사한 (N을 포함한) 또래 친구 네댓 놈과 군대를 갓 제대한 스물세 살에 J와 K를 처음 만났다. 특별히 모난 녀석이 없던 우리는 그 나잇대 남자애들이 그렇듯 게임과 술로 금세 가까워졌다.


 내 기억 속 K는 꽤나 독특한 녀석이었다. 추운 날에도 유니폼 잠바의 지퍼를 결코 채우는 법이 없던, 그러면서 늘 카키색 카고바지에 양손을 찔러 넣고 건들건들 걷던, 어느 날 갑자기 몸만 사회로 뚝 떨어진 말년병장 같은 놈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오로지 돈이었고, 목표는 단순무식하게 일단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K에게 손재주도, 일머리도 없던 나는 별로 미덥지 않은 형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술 한 잔 걸치고 인생을 논할 때면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노라 주창하던 나였으니, 무리 안에서 우리 두 사람은 가장 어색한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혼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맨손으로 끙끙대며 헤매고 있는데, 어느새 N이 다가와 공구를 써서 상황을 쉽게 해결해버렸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K가 들릴 듯 말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은…… 도구를 쓸 줄 알아야죠.

난 애써 못 들은 척 한 뒤, 그 날 밤 모두 모인 술자리에서 그 상황을 설명하며 K가 한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은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고, 처음엔 다소 멋쩍어하던 K도 이내 껄껄 웃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린 보다 가까워진 듯했다.


 하지만 얼마 후, K와 내가 단둘이서 일 할 때였다. 그가 대뜸 물었다.     


“형. 돈 얼마 모으셨어요?”

“글쎄- 모은 게 없는데.”

"......여태까지 뭐하셨어요?"     


그 되바라진 물음에 마음이 상한 나는 대답 대신 쏘아보았고, 그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우린 그렇게 다시 서먹한 사이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와 나의 친밀도와 상관없이, 그 시절에 우리는 한 무리로 참 징글징글하게 붙어 다녔다. 알면 알수록 저마다 성격도 취향도 달랐지만, 서로에게 맞춰주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마냥 함께여서 좋았고, 그저 같이 라서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하리라 믿었다 한들, 그것은 분명 기분 좋은 착각이었고 순수했던 기대였으리라. 


 그러다 N의 이직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제 갈 길을 찾아 떠났다.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놈들로 채워졌지만, 언제부턴가 우린 더는 서로에게 서로를 맞추지 않았다. 죽이 잘 맞는 녀석끼리 뭉쳤고, 나머지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K도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그래도 가끔 모든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여 거하게 술판을 벌일 때면, K는 그 촌구석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주었다. 그때쯤 우리의 앙금은 이미 망각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웃고 즐길만한 추억들로만 수놓은 닻을 올린 후, 소주라는 순풍을 타고서 행복한 밤을 함께 항해했다. 그 해가 가기 전 나는 서울로 상경했고, 다음 해 수원역 먹자골목에서의 회동을 끝으로 모두 함께 모이는 일은 없었다. 내가 K를 본 것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우린 서로 안부를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K를 보러 간 것은, 내가 코로나로 직장을 잃은 백수였기 때문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충분한 친구들을 대신해 한가한 나라도 가서 향 피우고, 절 두 번 하고, 구석에서 육개장 한 그릇 조용히 비우고 돌아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입구에서부터 엄습했다. 아무리 코로나 시국이라지만 K의 빈소에는 문상객도, 문상객을 맞이하는 이도 없었다.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부조금을 넣고, 방명록을 쓰고, 녀석의 영정사진 앞에 서서 향을 피우자, 그제야 구석에서 한가롭게 누웠던 이가 허겁지겁 일어나 방 안에 사람들을 부랴부랴 깨웠다. 이내 홀로 상장을 찬 젊은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와 맞절을 하고 나니 이번엔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이 방에서 나왔다. 옷차림을 보니 먼 친척인 듯했다. 그녀가 K와의 관계를 물었다. 

    

“오래전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형입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연습한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고서는 갑자기 울먹이며 말했다.     


“K가 사는 게 너무 힘들었나 봐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그곳까지 오는 동안 결코 먼저 묻지도 짐작도 않으리라 다짐했던, 혹시나 옆 테이블에 취객의 한탄으로 듣게 되더라도 애써 모른 척하려 했던 말이었다. 그런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먼저 듣고야 말았다. 이후 떠밀리듯 육개장이 차려진 식탁에 앉았을 때, 상주가 따라와 마주 앉으며 물었다.     


“우리 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십여 년 전 고작 몇 달을 함께했던 내게 그 물음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가혹한 질문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의 동생이 먼저 털어놓았다.


 K와 내가 처음 만난 그즈음, 그의 가족들은 여러 이유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장남이었던 K는 언젠가는 가족 모두가 다시금 함께 모여 사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K는 더 조급해졌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더 궁핍해지고 외로워졌다. 이후로도 K는 늘 악착같이 살았으나 빚은 점점 늘어만 가고, J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가족은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도 모자라,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의 마지막 K의 몸부림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 시국에서 신용불량자였던 그에게 허락된 일은 고작 편의점 아르바이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16시간 이상 일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편의점 알바시급으로는 달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 순 없었다. 끝내 K는 동생에게 이번 생은 틀렸다는 말을 남기고서, 없을지도 모를 다음 생을 찾아 떠났다. 그의 꿈도 허공으로 흩어졌고, 세상에 홀로 남은 그의 동생은 형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수백 번 되뇌었을 그 물음을 첫 조문객이었던 내게 한 것이다.


 나는 그 긴 이야기를 들으며 이 모든 것이 결국 코로나 탓이라 여겼다. K를 쓸쓸한 죽음으로 내몬 것, J와 N이 오랜 친구의 빈소를 오지 못한 것, 올 봄 내가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잃은 것 모두 코로나 때문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K는 우리와 화성에서 함께했던 그 짧은 시절을 무척 그리워했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추억하지만, 사실 우리가 다니던 그 공장은 급여도 근무환경도 열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고작 그런 일자리마저도 K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K를 죽게 만든 것은 빚도 고독도 아닌, 그에게서 재기의 기회를 약탈한 코로나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코로나 때문이어야 했는지 모른다. 새파랗게 젊던 K가 왜 그리 돈에만 집착했는지 그땐 미처 몰랐기에, 이렇게 십여 년이 흘러 그의 장례식장에 와서야 비로소 알았기에,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K가 생애 가장 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가롭게 낮잠이나 자고 있었기에, 그가 겪은 깊은 고통에 비해 내가 가진 단어와 문장이 이다지도 얕고 뻔하기에…….     


  동생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기억 속 스물세 살에 K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말년병장처럼 늘 당당하고 가슴에 품은 것이 가득했던, 한 눈 팔지 않고 언제나 앞만 보며 달려갔던,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거나 상처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그리고 가족을 끔찍이도 아꼈던 K를...... 동생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1년 01월 24일 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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