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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an 20. 2022

그날 내 주먹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사랑'이라 씁니다

나는 싸움을 못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싸움, 이른바 주먹다짐에 영 소질이 없다. 어릴 적부터 체구가 작고 몸이 약했던 나는 간간이 벌였던 주먹다짐에서 속 시원하게 이겨본 적이 없다. 남자애들이 한 번씩은 다녀봤다는 태권도장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본 적 없고, 원체 겁이 많아서 갈등이 생기면 입을 다물거나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내가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나는 별걸 다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싸우는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흡사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것처럼 블랙아웃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생긴 우스운 일화도 있다. 




 내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은 큰형은 당시 싸움실력도 좋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이사 갈 때마다 동네 골목대장을 도맡았었다. 그러면서도 방과 후에는 동네아이들과 놀기보다 용돈벌이를 위해 신문배달을 하거나 혼자서 이곳저곳 놀러 다니던 요즘말로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동네에 동갑내기 녀석이 이사 왔는데 그 애의 형이 큰형과 동갑이었다. 그는 큰형과 달리 이사 온 직후부터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내 골목대장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눈꼴사나워 형에게 일러바쳤지만 형은 관심 없는 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그 형과 싸우면 지나?”라고 묻자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금마가 날 이긴다 카고(말하고) 다니면 그 때 말해라.
조자주께.(조져줄게)


나의 우상, 나의 큰형


형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내 자부심도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암. 우리 형이 질 리가 없지.’ 그 때부터 나는 녀석의 형이 큰형을 조금이라도 얕보기를 내심 기다렸다. 하지만 일은 엉뚱할 때 터졌다. 

 형들은 없고 나와 동갑내기 녀석 그리고 또래 애들만 삼삼오오 모였을 때였다. 녀석이 자기 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랑을 하다, 다른 친구가 우리 형을 언급하자 녀석이 발끈했다.      


우리 형이 싸움 더 잘해.


자존심이 상한 나는 우리 형이 더 잘한다며 맞불을 놓았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몸싸움이 붙었는데 …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다음 기억은 내가 엉엉 울면서 누군가로부터 전력을 다해 달아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장으로 뻗은 내리막길을 달리다 결국 아랫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붙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쫓아와 나를 혼낸 사람은 그 녀석도 아니고 녀석의 형도 아닌 바로 녀석의 엄마였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붙잡혀 길바닥에서 혼쭐이 난 뒤, 혼자서 찔찔 울며 동네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시간들에 대해 다른 친구에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녀석과 나는 몸싸움이 붙은 후 주먹을 한 두 차례 주고받다가 이내 뒤엉켰는데 어느 순간 내가 녀석의 귀를 냅다 물어버렸다고 한다. 얼마나 쌔게 물었는지 녀석의 귀에서 피가 났고, 그제야 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 녀석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녀석은 형 대신 자기 엄마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그 때까지도 분이 안 풀려 씩씩 거리고 있던 나는 녀석의 엄마를 보자마자 겁을 집어먹고서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순간을 그 당시에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주먹다짐을 벌일 때마다 기억을 잃으니, 구경하던 애들이 내게 이겼노라 축하해줘도 전혀 통쾌하지 않았고, 거꾸로 호되게 당해도 내 기억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것부터 시작되니 어떻게 졌는지 도무지 복기가 안 되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일까? 왜 나는 주먹다짐이나 씨름을 할 때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일까? 도대체 마음속에 어떤 존재가 승패와 상관없이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일까? 지나친 긴장? 패배에 대한 두려움?     



    

나는 여태껏 내가 가진 무수한 단점, 문제 행동 또는 비상식적인 반응들을 나의 천성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분명 생겨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이를테면 트라우마 같은 그러한 원인은 그 존재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로인해 파생된 단점들이 사라지거나 조금이나마 완화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흡사 범인을 쫓는 베테랑 형사처럼, 병의 뿌리를 찾아내려는 노련한 의사처럼 흩어진 기억들을 모으고 심리학 관련 책과 영상들을 열심히 찾아보며 내 단점들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그 결과 나는 스스로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여러 아픈 기억들에 유의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것들 대부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끔찍하고 비극적인 과거였기에, 망각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는 오랫동안 잠재의식이라는 심해 속에 숨어있다 힘겹게 떠올랐고, 어떤 것은 평소 아무렇지 않게 부유(浮游)했으나 실은 내 삶에 일찍부터 남다른 영향을 끼쳐온 존재임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또한 내 기억력이 아무리 유별나다 한들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는 없었기에, 어떤 것은 이십대 초반에 일찍 발견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것은 무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실체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찾아내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쫓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영영 해결되지 못하는 영구미제사건도 있는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생겨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나의 모습도 존재한다. 그 중에 하나가 앞서 말한, 이른바 ‘몸싸움 블랙아웃’이다. 나는 고교 2학년 이후로 주먹다짐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블랙아웃의 진짜 원인도 알아낼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난 가끔 내 앞에서 버젓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걸어가거나, 인터넷에 이른바 민폐 동영상이 뜨면 괜히 울컥울컥하면서 그들의 멱살을 잡고 혼쭐을 내는 상상을 하곤 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 상상 속에서 나는 테스토스테론을 마구 뿜어내는 사나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키 작고 왜소한 중년 남성일 뿐이다. 이런 나를 고쳐보려 한 때는 호기롭게 복싱 도장이나 이종격투기 도장을 등록한 적이 있지만 한참 부족한 내 운동 재능만 재확인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영영 싸움을 못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그래왔듯 가급적이면 충돌을 피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고, 괜히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 된다면 애써 자리를 뜨거나 더럽고 치사해도 먼저 사과하고 말 것이다. 다행인 것은 어릴 적에는 이럴 때마다 겁쟁이 취급을 받았겠지만, 이제 이 나이를 먹고 나니 오히려 그것이 현명한 처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또 모르지. 올 4월에 있을 UFC 페터급 타이틀전에서 ‘코리안 좀비’ 정찬성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로 챔피언에 등극한다면, 그 경기에 자극을 받아서 충동적으로 동네 주짓수 도장에 등록할지도. 

 

아서라! 젊은 친구들한테 망신이나 당할까. 

   

코리안 좀비 파이팅!


2022년 2월 2일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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