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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철 Jun 05. 2020

비, 눈, 떨어지는 벚꽃 그리고 모노노아와레

최근 몇 년간 반복적으로 내가 보고 있는 영화나 애니들을 돌아보니 조금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내가 특별한 취향이 있거나, 특정 장르에 심취하는 덕후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책, 영화와 애니들을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었지만 반복적으로 시청하는 빈도가 좀 더 높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이런 류들은 대부분 조금 슬프거나, 아련하거나 또는 외로움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것들이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과 세상살이가 너무 치열하다는 핑계로 주변에 대해 참 무심해지고 메말라졌던 나 자신 때문에 이런 종류의 감정에 더 관심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교 3년 시절을 보낸 마산고등학교는 마산만이 바라다 보이는 무학산 중턱에 올라타 있다. 학교 정문에서 양쪽으로 펼쳐진 길에는 매우 오래된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벚꽃이 만개한 시기에 학교로 올라가는 길은 하늘은 뒤덮은 벚꽃으로 터널이 만들어졌다.


너무도 짧은 기간 동안 만개하는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은 봄비와 바람과 함께 온 하늘을 뒤덮으며 흩날리며 떨어진다. 그 아름다움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런 류의 아름다움에 별 관심이 없는 고등학생에게도 그 광경은 아름다움과 함께 왠지 슬프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외로움, 슬픔, 적막함, 쓸쓸함에 동조되게 만드는 몇 개의 영화와 애니들에서 표현되는 비와 벚꽃 그리고 눈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 언어의 정원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 상상 가능한 온갖 종류의 비가 내린다. 신카이 마카토 감독은 그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이르기 이전의, 고독하게 누군가를 희구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이야기. 누군가와의 사랑도 유대도 약속도 없이, 먼 곳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개인을 그려내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비’라는 매개물이 언어의 정원이라는 애니메이션 러닝타임 내내 뿌려진다.


남주인공 고등학생 타카오는 비가 오는 날에는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시쳇말로 땡땡이를 친다. 배경이 되는 신주쿠교엔 안의 정자에서 유키노를 만난다. 유키노는 또 다른 사연을 가지고 비가 오는 날 그곳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비가 오는 날에만 그곳에서 만난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애당초 두 사람이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 비가 오는 날에 두 사람은 그곳을 향할 뿐이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날 뿐이다.


아무 유대도 없고, 약속도 없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주는 것은 비다. 비가 오는 날에는 두 남녀 주인공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그 거리가 멀어진다. 언어의 정원에서 비는 그 눈부신 배경의 디테일과 함께 두 사람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철저하게 절제된 스토리와 대사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지만, 러닝타임 내내 쏟아지는 비와 아름다운 배경의 묘사만으로도 슬픔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 4월 이야기


너무 우연하게 접한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이와이 슌지가 누군지도 잘 몰랐던 시절이다. 신인이었던 마츠 다카코의 샤방샤방한 원피스와 흰색 운동화, 자전거, 사랑에 빠진 스무 살 일상의 이야기들은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영화는 기승전결도 없다. 시작하다가 바로 끝이 나는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 우츠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이사한다. 이사하는 날 흩뿌리며 떨어지는 벚꽃은 스크린을 뒤덮으며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슬픔과 먹먹함 그리고 설렘을 같이 전한다. 슬픔, 먹먹함 그리고 설렘은 익숙한 것들을 떠나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우츠키의 감정에 동화된다.


도쿄의 대학에 입학한 우츠키는 고교시절 짝사랑했던 선배를 찾는다. 선배가 일하는 서점을 찾은 우츠키의 설렘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서점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뿌린다. 비는 다시 잠시 동안 두 사람을 묶어준다. 봄날의 흩뿌리는 빗속에 빨간 우산을 든 우츠키는, 아니 4월 이야기는 나에게 그리움의 대상이다.


# 초속 5센티미터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 ‘초속 5cm’의 캐치 프레이즈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한다. 영화는 기다림과 설렘 그리고 슬픔을 이야기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불친절한 감독이다. 영화에서 내러티브로 설명해주는 것들을 최소화시킨다. 그리고 영상과 이미지, 영화 속의 장치들로 이야기한다.


초속 5센티미터는 초등학교 시절의 각별한 친구였던 아카리와 타카키의 기다림, 설렘 그리고 헤어짐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카리의 이사로 다른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헤어진 두 사람은 6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 이화후네역이란 곳에서 만나기로 한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그날에 엄청난 양의 폭설이 내린다. 폭설로 인해 타카키가 탄 기차는 계속해서 연착하게 되고 기차가 갈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했다. 결국 예정되었던 시간을 훨씬 넘어서 시골 간이역 같은 이화후네역에 도착한다.


타카키는 그 시간까지 아카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아카리는 얼어붙은 몸을 스스로 부여잡고 역 안에서 타카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근처의 헛간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헤어진다. 얼어붙은 헛간 안에 붙어 앉아 밤을 지새우는 두 사람은 알고 있다. 같이 있는 시간의 기쁨보다 앞으로 헤어져 있어야 할 기약 없는 시간들과 그로 인한 슬픔들이 얼마나 클지 알기 때문에 더 아프다. 폭설로 내린 눈은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갔지만, 한편으로 눈으로 인해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가올 슬픔을 알기에 더 아픈 마음으로 서로의 길로 돌아간다.


성인이 된 타카키는 무료한 일상을 버티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그의 마음 한 곳에는 여전히 아카리로 인한 공허함과 공백이 있다. 하지만 아카리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아카리는 약혼자를 위해 어느 봄날 벚꽃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 그곳에서 아카리와 타카키는 서로를 우연히 스쳐 지나간다. 봄날에 흩날리면 떨어지는 벚꽃 아래에서.


어린 시절의 설렘과 기다림,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은 다시 떨어지는 벚꽃 아래에서 슬픔과 아림의 절정을 이룬다.


#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일본의 서정적인 애니메이션들 (언어의 정원,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췌장이 되고 싶어 등)과 영화들(4월 이야기, 러브레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을 보면 유독 비, 눈, 그리고 벚꽃이 흩날리며 떨어지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 신토(神道)는 자연숭배의 관념이 강하고, 자연을 신격화하는 문화적 전통이 엄연한 실체로서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본적인 가치체계, 사유 형식 안에 깊이 스며 있다. 이미 문화로서 내재화되어 있는 이런 영향이 그들의 문화적 측면에서 발현되고 있고 특히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연의 현상들을 인간의 삶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매개물로서 나타난다.


서정적인 영화와 애니메이션들에서는 이런 자연(또는 자연현상)을 통하여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쓸쓸함, 적막함을 절제된 영상과 표현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이를 모노노아와레의 미학이라고 표현한다.


모노노아와레는 사물 또는 자연을 통하여 느끼는 비애와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로 특히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학적 특징에서 유래했다. 일본인 특유의 슬픈 정서, 슬픈 느낌을 표현하며, 이런 정서는 일본문화에 깊이 내재화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슬픔의 미학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민족의 ‘한(恨)’이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 듯하지만 어느 정도 교차되고 공유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감정의 일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다만 특정 지역이나 나라마다 축적된 문화적 전통과 양식에 따라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사물과 찰나에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경험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동조의 정도가 다르고 그 감정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정도가 차이점일 것이다.


# 사족


식민지 지배를 겪었던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인들의 모노노아와레라는 감정을 들여다보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주변국들에 대한 침탈과 가해의 책임이 여전히 남아있고, 특히 지도층의 진지한 반성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극도로 절제된 심미적 감수성을 정의와 공의 또는 인간다움보다 앞에 두고 아름다움을 얘기하게 되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소개한 영화나 애니에 나오는 장면들과 감정 또는 감성들은 전쟁이나 식민지배의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일본인들의 모노노아와레라는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가끔씩 확대하여 그들의 역사에 대한 정당화를 내세우는 경향에 대한 우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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