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da life & Travel all over the world
국제결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어떻게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됐는지, 그간 어떤 배경을 차곡차곡 덧칠해갔는지부터 시작해야 할거 같습니다.
현재 나이 32살 젊디 젊은 나이지만 그간 제게 몇 가지 인생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하고 떠난 일이었습니다. 두 살 터울 친형이 호주로 1년간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오는 모습을 보면서 동경이라긴 보단 막연히 저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단 막연한 생각을 하며 여정을 결심했죠. 형은 호주를 다녀왔으니, 나는 딴 나라로 가봐야겠다 싶어 결정한 곳은 바로 '캐나다'. 2013년 당시에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접수 시 각종 서류를 비롯해 우체국 소인 날짜, 시간이 찍힌 것을 토대로 선착순으로 이뤄지고 있었는데 새벽 5시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우체국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0명의 선착순 인원에 뽑혀 무작정 편도 항공권만 구입해서 카우보이의 도시 '캘거리'로 떠났습니다.
영어 실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막상 부딪히면 해결되겠거니 하며, 넉살 좋게 여행길에 올랐죠. 그런데 웬걸 삼일 정도 조용한 도시에서 살아보니. 해외에서 사는 게 참 별거 없는 거구나 싶은 거였어요. 생각보다 해외에서 사는 게 쉽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느껴졌었죠. 제가 기억하는 그해 3월 캐나다 캘거리의 풍경은 온통 벌거벗은 사시나무가 심어진 긴 가로수를 따라 한참을 걸어도 개미 하나 사람 한 명 보기 힘든 적적한 도시였어요.
그렇게 3일째 똑같은 날을 되풀이하던 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다른 건 몰라도 영어 하나만큼은 제대로 배워서 가자'라는 것이었어요. 아주 무식한 방법이지만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히 영어실력이 늘 것이라 생각을 했고 불효 막심하게도 제일 먼저 부모님께 한동안 연락 안 하겠다고 말씀드리곤 연락을 끊었어요. 여기서 안 그치고 여자 친구와 연락도 끊고 헤어지자 말했습니다. 불효에 이어, 싹퉁바가지 없는 인간이 되었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워홀을 하는 동안 한국인들과는 일절 만나지 않겠다! 다짐하며 어디서든 한국어 소리가 난다 싶으면 후다닥 자리를 떠났고, 누가 말을 걸어와도 모르쇠 하며 살아갔습니다. 일자리도 일부러 외국인들만 모여있는 곳만 이력서를 던지고 갔는데,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 주방일에 뽑혀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해외에서 같은 한국인과 담을 쌓으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방법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안 쓴다고 해서 결코 영어가 많이 느는 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스스로 고립되면서 우울하고 외로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한편 제가 가진 생각과 마음을 외국어로 온전히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니 외국인 친구와도 깊이 사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죠. 일할 때도 부족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늘 추측하며 답했던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다행히 대만, 중국인 친구들을 하나 둘 사귀면서 캐나다에서의 추억이 알록달록 물들었지만 늘 가슴 한 편이 답답하고 고독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다시 한번 따분했던 삶에 변화를 주고자 캐나다 동쪽 몬트리올로 떠났는데 운 좋게도 시골 캠핑장 키퍼로 고용되었습니다. 더불어 아이돌보미, 아이스와인 포도 피킹 등 이런저런 부업 등을 통해 쥐꼬리만 한 자금을 조금씩 모아갔습니다. 캐나다 동부(퀘벡-서튼)에서 일하던 캠핑장은 독특하게도 캐나다 내에서도 아주 한적한 시골로 곰과 사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이자 인터넷 조차도 곧잘 끊기는 외딴곳이었어요. 어떤 날은 주인조차 휴가로 자리를 비워서 사람 한 명 없는 넓은 농장에 홀로 남아, 밤하늘에 우수수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낭만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캘거리 도시 때보다 더 사회와 고립된 생활을 하고 한국어가 존재하지도 않는 외국에 살면서 쓸쓸함이 더해갔죠. 그리고 슬슬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1년을 채워갈 시점, 고민에 빠집니다.
영어실력이 만족할 만큼 늘지 않았던 게 큰 고민이었는데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워킹홀리데이 1년을 허투루 보낼 거 같아 특히 두려워졌습니다. 물론 남들과 다른 진귀한 경험들을 쌓았지만 당시에 저는 욕심쟁이였던 모양이었나 봅니다. 제가 보낸 워킹홀리데이 삶이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중 여행이나 해볼까 싶어 구글맵을 켜놓고 스크롤을 쭉 내려 지도를 확대하고 나니,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처음에는 가까운 도시 미국이 눈에 들어왔고 이내 남미와 유럽, 러시아까지 보였습니다. 노트북 모니터에 손을 대보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도 안 되는 거리지만, 무언가 다양한 이야기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만 했어요. 곧바로 항공편과 기차들을 예약하며 일정들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정이 좋지 않아도 제일 싸다 싶은 티켓을 구매해서 여행 일정을 만들었는데 정말 비효율의 끝판왕이었죠. 예컨대 캐나다 동서부를 50시간짜리 버스로 이동했고 미국에서 코펜하겐을 갈 땐 비행기를 3번 갈아타며 아이슬란드에서 11시간 이상의 대기를 갖는 스케줄이었어요. 유레일패스 연속권을 사용할 때도 입석 야간 좌석을 타고 2박 5일의 여행을 했고 스톡홀름 기차역 샤워실에서 씻었습니다. 왜 그렇게 여행했냐고 물으신다면, 정말 우습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패기'가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캐내다에서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 수 있었다는 경험에 앞으로의 두려움은 하나도 없었던 때였으니까요.
여행의 마지막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열차를 타서 배 타고 한국의 동해까지 돌아오는 기막힌 일정이었는데, 아쉽게도 여행 다녔던 당시의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것이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이라 생각했고 추억과 기억들을 온전히 제 정신세계에 담아둬야 한다고 믿는 감성충이었거든요. 게다가 온갖 허례허식으로부터 멀어져서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도, 수염도 자르지 않았어요. 털을 자르는 일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행위라 믿었기 때문이죠. 당시의 생각을 결코 후회하진 않지만 지나온 과거를 먼발치에서 바라본 지금에서는 쓸 때 없는데 애쓰고 고집을 부렸구나는 생각도 해봅니다. 덧붙여 수염과 머리는 자르는 게 생활하는데 훨씬 편하다는 답도 찾았습니다.(웃음)
어쨌거나 두 달 반 정도 여러 도시 여행들을 다니던 중 잠은 '카우치서핑'이라 하여 현지인의 집에 마련된 소파를 빌려서 자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심한 척 살갑게 도움을 주던 중국인 친구들,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며 함께 감상평을 나눠주던 핀란드의 영화감독, 프랑스어 희극을 보여주며 귓속말로 내용을 소개해준 캐나다 대학생 친구, 코펜하겐 대학교 기숙사에서의 하루, 나에게 피자를 사주었던 멕시코의 장의사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느꼈던 감정들은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었는데, 그것은 '공감'이었습니다. 수없이 외롭고 쓸쓸했던 지난 캐나다에서의 삶에 대해 묵묵히 들어주고 기꺼이 자신의 소파와 먹을 것을 나누어줬던 이름 모를 세계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꼭 꼭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 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와이프는 언제 만났냐고요?
그 이야기는 바로 다음에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