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모 회사인 현 직장을 들어온 건 7개월 전이다.
작년 3월. 나는 13년간의 참고 참던 설움이 북받쳐 와 나를 괴롭히는 5살 어린 싱가포리안 상사를 들이받고 시원하게 사표를 날렸다. 물론 그 13년간 싱가포리안 아줌마. 인디안 할머니. 한국계 미국인 아저씨.파키스탄계 여자 등 숱한 아시안 인종의 다이렉트 보쓰를 만나왔다.
그뒤로 박사준비와 재취업을 병행하던 나는 운좋게도 3개의 잡오퍼를 받았고 고심끝에 현 직장을 선택했다.
13년간의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passive aggressive 한 싱가포리안이 없는 조직에 가고자 한 열망과 재택이 가능해 언제든 한국에 올 수 있다는 장점에서다.
게다가 나의 보스는 미쿡인.
손에 피한방울 안묻히고 상대를 괴롭히는 문화가 팽배한 이 덥고 좁아터진 나라에서 더러운 경쟁심과 낮은 자존감으로 오피스문화를 망가뜨리는 싱가들이 없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으로 떠올라 나는 지난 7개월 간 나름 편하게 업무를 할 수 있었다.
미쿡놈은 다를 줄 알았다. 아니 처음엔 달랐었다. 나보다 12살이나 어린놈이었지만 나름 아이비리그에서 석사까지 받은 인재에 똘똘했다. 실력도 있었고 친절했다.
하지만 언제나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산 넘어 산이란 진리.
오늘 그놈한테 난 모욕감을 느꼈다.
똘똘한 만큼 더 지능적으로 나를 밟아댔다.
그것도 아시아헤드가 지켜보는 앞에서.
내 자존심을 박박 긁어댔다.
"너는 조직의 위계서열을 무시했고 나를 무시했어."
"너는 프로페셔널 하지 못했어."
뭔 개소린가 하니.
때는 작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입사 한달만에 기똥찬 인사이트를 담은 8천자 리폿을 그에게 제출했다.
한달만에 걸작을 완성한 나를 보고 그는 연신
"나는 들어와서 4개월간 리포트 하나도 못 냈다.넌 참 일을 빨리 한다" 등등
온갖 칭찬의 탈을 썼으나 경외와 경계의 중간같은 멘트를 날려댔다.
난 사실 그때 직감했다.
이놈도 좌불안석 매니저형인가?
해외에서 숱한 외국인 보쓰를 만나본 결과 느낀 건 외국엔 크게 두 종류의 보쓰가 있는데 첫째는 업무를 1도 모르고 인력관리만 하는 사람. 그래서 더더욱 권위적이고 자존감 낮은 유형. 둘째는 업무를 알지만 항상 부하직원 보다 능가해야 한다는 자기강박에 시달려 부하직원을 micro managing하며 괴롭히는 사람.
난 한국 직장에서 만났던 업무통달에 아버지 내지 선배를 자처하는 스승형 보쓰를 해외에서 단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결론은 본디 그런 꼰대들이 싫어 외국을 나왔으나외국놈들에게 더욱 심한 권위와 복종 딸랑딸랑을 강요받은 셈이다. 아이러니컬 하다.
여튼 큰 기대를 걸었던 이 미쿡놈도 결국 어설픈 지식과 낮은 자존감으로 부하직원을 찍어누르는 놈에 불과했다.
이놈은 내 초안을 리뷰하는데 장장 1달을 보내고 7번을 빠꾸하며 나를 개고생 시켰다.
내용 보다는 글쓰기 토씨 표현 이딴걸로 집요하게 시비를 걸었다.
나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길을 헤매는 신세가 된 것 같았다.
대체 리포트를 내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통상 타 조직에선 매니저들은 내용,주제,분석 등에만 토를 달지 이놈처럼 자잘하게 문장 갖고 뭐라 하진 않는다.
어차피 편집팀에서 할 일들인데 왜 자꾸 무한 리뷰를 반복하는 건지 정말 화가 날 정도였다.
내가 그러고 삽질을 하는 사이에 난데없이 유럽에 있는 다른 애널리스트가 내가 쓴 방법론과 유사한 것으로 분석한 리포트를 내보냈다.
나는 뭔가 특종을 놓친 물 먹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내꺼를 봤나? 어쩜 이리 비슷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데드라인은 점점 다가오고 난 급기야 싱가폴에서 근무를 하는 모 동료에게 sos를 치기에 이르렀다.
그 동료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보쓰 위의 아시아 헤드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위로를 해줬다.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시아헤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로인해 나의 리포트는 데드라인을 넘겨 휴짓조각이 되지 않고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이 일은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근데 갑자기 요근래 이 미국 보쓰의 낌새가 이상했다.
특히 내가 최근 쓴 보고서를 갖고는 장장 30분간 난도질을 하는가 하면, 내가 발제한 것과 비슷한 주제로 다른 애널리스트에게 리포트를 쓰라고 하질 않나.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난 이번에도 아시아헤드에게 sos를 쳤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지극히 공자님 썰 푸는 내용.
작년엔 그가 완벽주의자라 그러니 참으라며 내편을 들어주고 막힌 물꼬를 터 리포트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주더니.
이번엔 태도가 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늘 아침 보쓰가 3자 컨퍼런스콜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올 것이 왔구나 했지만 설마설마 했지만.
더 충격적이었다.
"너는 조직의 위계서열을 무시했고 나를 무시했어."
"너는 프로페셔널 하지 못했어."
뭔 개솔?
내용인즉슨 내가 아시아헤드에게 자기 얘기를 했다는 거였다. 심히 열이 받은 모양이긴 했으나 나도 할말은 많다.
"다른 조직에서도 HR에서도 상사와 문제가 있을때 그위의 헤드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일반적이다.
나는 오로지 데드라인 안에 리포트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한달만에 초안을 썼는데 내용 보다는 문장 다듬느라 한달을 허비했다.
나는 외부에서 들어온 신입으로서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발견했고 개선점을 디렉터 에게 개진했을 뿐이다.
다른 조직들처럼 매니저는 내용 위주로 편집팀은 글 위주로 리뷰를 하는 것이 더욱 시간을 단축하고 생산성을 높인다고 생각해서 건의를 한 것이다.
일과 조직을 위해 한 것이니 오해 말길 바란다."
여튼 그랬다.
베트남계 호주인인 디렉터는 미쿡 띠동갑 보쓰의 무지막지한 인신공격급 폄훼발언과 나의 항변을 듣더니 또 중립적인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누구 편도 안들고자 하는 듯 보였고
"나는 너희 둘다 우리 조직에서 오래 일했으면 한다."
"너는 앞으로도 문제가 있으면 (boss를 안 거치고) 나에게 얘기할 수 있다."
이게 그녀의 답. 끝.
모르겠다.
결론은 어느 조직이든 정치는 존재하고 외국엔 승냥이같은 보쓰가 더 많다는 것. 나를 키워주는 보쓰보다 자리보전을 위해 나를 밟는 보쓰가 더 많다는 사실.그리고 내가 나이들어 가는 사이, 이 외국인 보쓰들의 나이는 점점 어려지고 있었다. 나도 꼰대인가?
띠동갑 미쿡인보쓰를 대하는 자세는 어때야 할까?
밥 벌어 먹는 건 어디나 고되고 씁쓸하다.
PS. 이글을 읽으신 분들 가운데 정치에 능한 분들의 고견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