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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에게 Jun 05. 2022

[12월 32일]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작사일기 6일 차

별 - 12월 32일

Lyrics by 박진영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돌아온다고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면 된다고 
기다렸던 만큼 우리 행복할거라고 
조금 힘들어도 날 기다려 달라고 
그래서 나는 웃으며 기다렸어 
기다림은 오히려 즐겁게만 느껴졌어 
달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하지만 올해가 다 가도록 
마지막 달력을 넘기도록 
너는 결국 오질 않고 새해만 밝아서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울었어 
내게 1월1일은 없다고 
내 달력은 이 아니라고 
32일이라고 33일이라고 
니가 올 때까지 나에겐 아직 
12월이라고



기다림이란 때론 설레고 때론 지겹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을 끝없이 생각하는 일은 유통 기한을 알 수 없는 요구르트를 마시는 것처럼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을 견디면서 지망생이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당연히 데뷔다. 제발 수정 연락이라도 좀 왔으면! 내가 보낸 메일에 메아리라도 쳤으면!

데모를 받은 지 1년이 되지 않았던 2020년 겨울, 내게도 답장이 온 적이 있다.


[XXX] XXX 앨범 가사 수정 요청


기다리던 일이 막상 코 앞에 다가오면 기쁨보다는 당황이 먼저다. 메일을 열어보기도 전에 전화가 왔고 어벙벙한 마음으로 내 가사가 채택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약간의 수정만 거치자고.. 심지어 가사가 좋다는 칭찬까지 함께였다.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수정을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 통화 내용을 녹음해서 듣고 또 들었다. Like 최초의 근거 있는 칭찬. 작사를 더 해도 된다는 증명서. 나 때려치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영혼까지 끌어모아 수정 파일을 보냈고, 녹음실로 가사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 내 가사가 울려 퍼지기를 그리 바랬건만 막상 나온다고 하니까 뜯어볼수록 부족하고 수줍었다. 심지어 그 시안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쓴 시안도 아니었고, 순간적인 이미지에 이끌려 후루룩 쓴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쓰였을 수도 있겠다.) 섹시한 곡인데 친구들이 듣고 놀리면 어쩌지? 이제 예명을 써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하며 지인들에게 자랑을 했다. 곧 노래가 나올 것 같아. 언제냐고? 올해 안에 나온댔어. 아마 곧..?


그렇게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소식은커녕 나온다던 앨범에 대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엎어진 게 아닐까란 생각을 애써 무시했다. 별 언니처럼 32일이라고 33일이라고, 를 부르며 불길한 예감을 외면하였다. 이윽고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수소문을 통해 앨범 자체가 보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나의 첫 픽스 곡은 흙오이가 되었다.. 


작사를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곡이 엎어졌다, 내 가사가 아닌 채로 거리에서 흘러나왔다, 말도 안 하고 재의뢰를 뿌렸다, 등의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남의 썰을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유명한 가수의 곡은 아니었지만 불행을 몰고 오기엔 충분했다. 아무 언질도 없이 끝나버릴 약속이라면 애초에 의미가 있을까? 이 말도 안 되는 생태를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복어처럼 독이 가득 쌓인 채 작사가도 아니면서 작사가의 설움을 체감했다. 그즈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비리에 대한 다큐까지 방영이 되었고 나는 더욱 흑화 하였다. 강제 노역에 소집된 사람처럼 꾸역꾸역 곡을 쓰고 다른 이름으로 곡이 나올 때마다 더 크게 절망했다. 권태기 연인을 바라보든 워드 창을 시니컬하게 응시했다. 냉소는 꽤 길었고, 결국 작사를 잠시 쉬다가 다른 학원의 중급반으로 터전을 옮겨버렸다.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사를 계속하는 이유라면, 그냥 내가 하기로 한 거니까. 불합리하고 아니꼬워도 결국 할 거니까. 아무도 등 떠민 사람 없고 그만두라한 사람도 없는 외로운 항해지만, 내 구질구질한 마음이 꽉 붙들고 있는 한 이 불안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서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어 줄거라 믿어보며.. 오늘도 나는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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