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제이 Aug 30. 2021

딸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자라서

여름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 상의 생일과 실제 생일이 다를 경우, 둘 중 하나, 대개 실제로 기념하는 생일은 음력인 경우가 많다. 음력 날짜를 민번으로 삼기도 하고, 태어난 양력 날짜를 올려놓고 음력대로 세기도 하고, 그도 아닐 경우 출생신고하러 간 날이 주민번호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태어 난 날과는 상관없이. 

 나도 생일이 두 개다.

 겨울에 하나, 여름에 하나.

 계절이 이렇게까지 차이나는 걸 보면 음력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밀레니얼이니까 앞선 베이비부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애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제야 출생신고를 하러 가서 벌어진 일도 아니다. 출생 신고할 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문서 상에만 존재하는 나의 겨울 생일은 딱히 개인적이지도 않은 개인정보로서의 의미만 가진다. 스무 살이 되기 전 까지는 그랬는데, 성인이 된 후로는 '내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선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의 오피셜 한 생일만 아는 사람,
  나의 '진짜' 생일을 아는 사람,
   나의 생일이 '왜' 두 개인지 아는 사람,
      또는 나의 '진짜' 생일만 아는 사람 등등

 겨울에 태어난 척 살아가는 여름 아이는 다 커서도 여전히 여름이 좋다. 어렸을 땐 여름에 내 생일이 있어서 좋았고, 지금은 추운 겨울이 싫어서 여름이 좋다. 제일 좋아하던 옷 중 하나는 가슴팍에 강아지 모양이 있는 빨간 티셔츠였고, 빨간 한복도 입을 때마다 신이 났다. 빨간 딸기는 온 내복에 범벅을 쳐 가면서 먹고는 했다. 

 여름은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온몸 구석구석 피어나는 아토피와 땀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약도 별로고 의학적 상식도 요즘 같지 않던 때였다. 소금이 피부에 좋다며 대중목욕탕 사우나 한편에 비치된 굵은소금을 오금이며 목덜미에 벅벅 문질러야만 했다. 

 생일이 여름방학 때 껴 있는 것도 속상했다. 나도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축하받고 싶은데, 방학 때는 친구들과 만나려면 집집마다 전화해서 약속을 잡아야 했다.

 안녕하세요 저 00이 친구 티제인데요, 00이 지금 집에 있나요? 감사합니다

  한 없이 어른스러운 척 고정 멘트를 난리던 시절이었다. 친구 이름 앞에 '몇 학년 몇 반'까지 더해주면 똑 부러지는 완벽한 학급 동무로 거듭날 수 있었다. 친한 친구들은 서로서로 집전화번호도 다 외웠던 것 같은데, 요즘은 배우자 전화번호도 긴가민가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즈음에는 이메일과 버디버디로 방학 때에도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더 이상 어른들의 참견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더욱 즐거웠던 것 같다. 거실 한복판에 자리한 유선전화로는 우리끼리만의 비밀을 쌓기가 어려웠으므로.

 컴퓨터도 거실에 있었다. 온 가족이 한 대의 컴퓨터를 돌아가서 썼기 때문에 친구들은 허구한 날 오빠 새끼와 싸우고 왔다. 이기적인 언니들도 있었지만 어쩐지 '오빠' 뒤에만 꼭 '새끼'가 붙었다. 쌍비읍과 쌍기역의 대구, 그리고 '아'에서 '애'로 이어지는 모음조화가 찰떡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기적인 손위 형제들 덕분에 그 당시 우리의 비밀에는 적당한 시간차가 있었다.

 그리고 교환일기.

 오늘자 나의 비밀을 적고, 내일은 친구의 비밀을 받아 보는 구조였다. 이것저것 예쁘게 그리고 꾸미느라 며칠 씩 걸리기도 했다. 빨리 달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이 매너였다. 시간차는 미덕이었나 보다. 

 교환일기의 가장 큰 고비는 방학이었다. 교환일기는 뭔가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요소인데, 교환일기를 교환하기 위해 약속을 잡고 만난다? 할 수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교환일기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방학 때 우리는 교환일기를 '보관'했다. 공평하게 '보관'하기 위해 방학 중에 만나기도 하고, 그 사이에 일기를 한 개 정도 쓰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보관기간'인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면 나는 수박과 딸기 대신 은행잎과 단풍잎을 그려 넣었다. 겨울에는 눈사람이나 눈송이를 그리고, 다시 봄이 되면 초록색 새싹과 병아리를, 그리고 다시 딸기로 돌아왔다.

 일기 배경에 딸기가 다시 돌아올 때 즈음이면 아무리 키가 작은 친구라도 딸기만큼 조금 더 자라 있었고, 교환일기의 중요도는 딸기 한 개만큼씩 작아졌다. 그렇게 자라고 자라고 줄고 줄어서 요즘에는 노란 카카오톡이 담긴 폰 하나가 모든 걸 대신한다. 


 작년인가 재작년부터 왕 큰 딸기가 나왔다. 킹스베리 딸기를 처음 봤을 때 뭐랄까, 말하자면 원근법이 위협받는 느낌이었다. 대왕 딸기, 슈퍼 딸기라고 했다. 심지어 속도 알차고 맛까지 좋았다. 과일별 제철이 따로 없는 요즘, 겨울딸기마저도 꽤 먹을만하다. 

 근데 나는 이제 딸기를 많이 못 먹는다. 그렇게 좋아하던 딸기였는데, 질렸다기보다는 몸이 받쳐주질 않는 편에 가깝다. 딸기 외에도 예전만큼 왕창 먹거나 범벅을 쳐 가며 즐기는 게 많이 줄었다. 빵순이인데 빵도 많이 먹으면 체한다. 떡도 그렇다. 그래서 이제는 어디 가서 뭐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 여기서 30년이 더 흐르면 그때는 글쓰기도 더 이상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름은 계속 좋아하고 싶다. 무덥고 아프더라도 여름만큼은 당당하게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매미가 입이 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