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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Sep 13. 2021

할머니와 도토리

도토리가 똑또르르르


 기억 잘하는 사람들 보면 항상 신기하다.

 드문드문 단편적인 장면으로밖에 남지 않은 터키 여행의 추억이라던가, 터질 것 같았던 허벅지 통증만 기억 날 듯 말 듯 한 10여 년 전 제주도 자전거 일주라던가. 

 작년, 재작년에 다녀온 여행마저도 때로는 가물가물 하기만 한 나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심히 믿는 구석 중 하나는 병아리 같은 친구인데, 그는 심지어 초등학교 시절 우리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이다.

 요새도 가끔 그때 그 대사를 읊고는 한다. 외따로 낯선 전학생에게 친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하는 인사와 함께 노란 개나리 같은 자기소개를 먼저 마치고, 네 이름은 뭐니? 라고 물었다고.


 할머니도 기억을 너무너무 잘한다. 

'너무'는 남발하지 말아야 할 수식어임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할머니는 그때 입었던 옷이며 모자며 무슨 신발을 신고 갔는지도 알고 계신다. 산타 할아버지는 모를 만한 것들도, 할머니라면 다 알고 계신다.

 TV에서 살짝 대각선에 위치한, 직사광선이 들이치지는 않으면서도 따스한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우리 집 상석에 자리하신 할머니는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으시다. <6시 내 고향>이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장수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많은 상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쇼닥터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아로니아나 파는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공신력 있는 국가 전문가들이 등판해서는 mRNA는 뭐고 혈전은 뭐고 다 알려 준다. TV가 바보상자라는 건 다 옛 말이다.

 각종 '~카더라'가 범람하는 인터넷에서 한껏 자유로운 할머니는 우리 집 만물박사 담당이다. 

 엄마는 당신 엄마와는 달리 TV파는 아니다. TV보다는 책이 훨씬 편하다며 어딜 가던 책을 한 두 권씩 꼭 들고 다닌다.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에는 그래서 항상 백팩이 걸려 있다. 뭐 하다 한 번 들어보면 꽤 무겁다. 

 본가에 가면 엄마는 보드라운 환영인사를 건넨 뒤 안방에 들어가 읽던 책으로 돌아간다. 엄마 주변에 놓인 책들은 각종 에세이나 불교 철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이사이에 나나 동생이 읽는 소설들이 끼어든다.

 엄마도 어렸을 땐 소설을 엄청 많이 읽었다고 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데미안을 읽고 또 읽고 그러고서도 또 읽고는 했다고. 그랬는데 이제는 내용도 기억이 잘 안 난다면서, 슬프다거나 감명 깊다는 말로는 채 표현되지 않는 그때의 감정만 남았네, 너네는 어땠니, 하고 묻는다. 

 엄마와 딸들이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다는 건 사람을 꽤 우쭐해지게 만들고는 한다. 독서모임 만으로도 이미 내 지적 허영심은 차고 넘치는데, 엄마까지 이렇게 곁에서 거들어주면 정말이지 유명 석학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야 만다. 

엄마, 책 다 읽었다면서요? 
  응! 근데 왜, 그 마지막 부분에, 거기서 딸이 왜 갑자기 말을 바꾼 거야? 
딸이 말을 바꾼 게 아니라 주인공이 처음부터 착각하고 있던 거지.
  주인공이? 아니 근데 앞전에 딸이 아빠 보고 가서 좀 말 좀 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주인공이 괜히 찔려서 그런 거라니까? 죄책감이라던가 이런 걸 애써 모른 척하다 보니까 괜히 딸 핑계 대고. 그래서 이게 잘 쓴 소설이라고 평가되는 것 같아. 자신은 '옳다'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다 늙어서 돌아보니 자신을 범죄자로 정의하는 세상이 되었잖아. 일생을 부정당한 개인의 심리를, 미시적으로는 그 솔직할 수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잘 그렸고, 거시적으로는 어쩌고저쩌고

 어쩌면 엄마는 다 알면서도 물어봐 주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 앞에서라면 어디 가서 부끄러워하지 못할 말들도 한껏 뽐내게 된다. 엄마 앞에서라면 어떤 못난 짓을 하더라도 사랑받으리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못난 자존감을 그득그득 채우는 것이다.

 이제는 독립해서 나 필요할 적에만 허한 구석을 채우러 엄마를 찾고는 하지만, 그런 엄마를 반려로 둔 아빠는 참 큰일이다. 이래도 잘했다, 저래도 잘했다, 앞으로도 계속 정말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신 줄만 알고 사실 텐데. 

 엄마는 내가 추천하는 책들을 뒤늦게라도 거진 다 읽어 보는 편인데, 정작 나는 엄마가 추천하는 책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책 자체를 엄마만큼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편식, 아니 편독도 심하다.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되겠냐며 아빠한테 뭐라 뭐라 하지 말 걸 그랬다.  

 할머니가 기억력 대마왕 박학다식한 척척박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엄마와 비슷할 것이다. 엄마가 뭐든 가리지 않고 읽듯 할머니는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예능, 오디션 프로그램, 다큐나 시사교양까지 뭐든 가리지 않고 보신다. 취향이 없는 건 아니다. 열심히 챙겨보시는 드라마가 있지만 남들의 양보를 받아가면서까지 보려 하지시는 않을 뿐이다. 놓친 부분은 재방송으로 보면 된다.

 읽기와 듣기는 말하기나 쓰기에 비해 수용적이다. 나이 든 여자와 조금 더 나이 든 여자가 이토록 품이 깊은 건, 그들이 여자이기 때문은 절대 아닐 테다. 나도 어디 가서는 굿 리스너인 척하고 살지만 집에만 오면 아빠가 피곤해할 정도로 수다쟁이라, 포용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나이가 변수라고 하기에도 세상 나잇값 못 하는 사람들이 떠오르므로, 두 번째 가설도 거짓이다. 


 할머니는 때때로 엄마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는 '큰 글씨 책' 시리즈도 보신다. 큰 글씨 책이 없으면 엄마는 종종 동화책도 빌려 오신다. 활자도 큼직해서 가독성이 진짜 좋기는 좋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는 딸이 빌려 온 동화책을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읽으시다가, 'ㅋㅋㅋ'하고 소리 내어 웃으셨다. 

도토리가 ㅋㅋㅋㅋㅋㅋㅋ이겤ㅋㅋㅋ도토리갘ㅋㅋㅋ

도토리 가 똑! 하고 떨어졌어요. 데구르르르르. 동글동글 도토리가 데구르르르 하고 굴러갑니다.

 동화책을 읽다 빵 터진 엄마가 궁금해서 딸은 조르르 쫓아와 물었다. 엄마, 뭐가 그렇게 재밌으셔유? 엄마는 웃느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도토맄ㅋㅋㅋㅋ 데구르릌ㅋㅋㅋㅋㅋㅋㅋ만 간신히 외치다가, 그만 웃음이 옮고 말았다.

 그림책 속 도토리에도 숨 넘어갈 듯 웃는 엄마가 웃겨서 딸도 웃음이 터졌고, 뭘 알지도 못하면서 웃는다고 같이 웃고 있는 딸내미가 웃겨서 엄마는 또 웃음이 터졌고, 웃음이 옮기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 마저 웃겨서 눈물이 나도록 또 웃다가 잔뜩 지쳐서야 겨우겨우 웃음이 그쳤고, 이렇게 웃은 적이 또 언제인가 싶어 피식 또 웃음이 났다고.

 호숫가를 산책할 때, 그리고 신흥사 앞에서, 할머니는 어머, 도토리가 벌써 떨어졌구나, 하시고는 걸음을 멈추셨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파랗고 설익은 도토리가 지천이었다. 있는 줄도 모르고 다들 바작바작 밟고 지나가는 쥐톨만 한 도토리를 두고 할머니는 연신 어머나, 다 떨어졌구나, 하시며 당신 딸을 부르셨다. 

 할머니가 도토리를 이토록 좋아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할머니는 도토리가 귀여웠던 것이다. 귀엽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어머, 아고, 감탄사만 연발하시면서. 

 작다란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달린 모양도, 각양각색의 모자를 쓴 녀석도, 댕글댕글한 민머리도. SNS에서 남의 집 고양이, 강아지 영상을 보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마냥 할머니는 도토리를 그렇게 귀여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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