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행을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환갑이 넘도록 자기 엄마와 둘이 여행을 가 본 적 없다며 더 늦기 전에 한 번 모녀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어디 가고 싶냐는 질문에 엄마는 바다가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엄마는 모녀 여행을 떠난 적 있지만, 할머니는 모녀 여행을 가 본 적 없다. 바다 건너 저 멀리 낯선 이국땅까지, 엄마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큰 딸들과 치근대며 다니던 여행의 추억이 엄마에게는 있어도 할머니에게는 없다.
나도 엄마 모시고 한 번 다녀와보려고. 언제 또 가겠어.
엄마는 언제나 좋은 딸이었다. 구식 버전의 K-장녀 노릇을 톡톡히 해냈고, 그럼에도 유세 떠는 일도 없이 이번에는 할머니와 모녀 여행을 가겠다고 몇 주 전부터 할머니 걷기 운동을 그렇게 시켰다.
할머니는 두 무릎이 다 인공관절이다. 손가락 관절은 이리저리 살짝씩 다 휘어 있는데, 손가락 관절염이라고, 뜨개질이며 바느질 같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고 했다.
나이 먹으면 뼈가 약해지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척추가 바스라질 수도 있다는 건 몰랐다. 작은 충격에도 쿠크다스처럼 부스러진 뼈에는 콘크리트(?) 같은 걸 발라서 보강했다. 우리 집 사람들 중 제일 작고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는 조금씩 인조인간이 되는 중이다.
본디 열이 많은 체질인 할머니는 무릎 수술 뒤부터 정강이 밑으로가 시리다고 하셨다. 수족냉증에 추위를 많이 타던 엄마는 이제 손이 엄청 따뜻하다.
뜨거운 손을 가진 여자와 차가운 발을 가진 여자가 강원도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를 낳은 여자, 동그란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고 수영을 못 하는 사람, 희. 그런 여자를 낳은 여자, 당뇨는 없지만 혈압은 좀 있는, 매운 걸 잘 못 먹는 사람, 유.
희는 유를 사랑하고 애달파하고 가끔은 서운하고 섭섭하다가도 또 안쓰러워했다가, 답답해했다가, 도로 사랑하고는 한다. 몇 년 전 혼자된 유는 희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부탁하는 법이 없다. 응 괜찮어. 유가 괜찮다고 하면 가끔 희는 짜증을 낸다. 엄마, 아프면 말을 하세요 참지 말고 말을.
둘의 여행은 잔잔하리라.
둘 다 말이 많지 않기도 하고, 과묵 까지는 아니어도 듣는 역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할머니는 당신 여동생과 한 시간씩 통화하고는 하는데, 가만히 듣다 보면 할머니의 분량은 거의 추임새다. 자매가 없는 엄마는 딸들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는다.
둘이 환상의 짝꿍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 정도는 아니다. 희는 유보다 잔소리가 많고 백 년 가까이 살아온 유는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는 게 더 편해 보인다. 희는 자기 딸한테는 그렇게 잔소리 못 하면서 당신 엄마한테는 이걸 드셔라 저걸 드셔라, 이렇게 입으셔라 벗으셔라 자꾸 등을 떠민다. 유는 원체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누가 옆에서 열심히 부추겨야만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유의 딸이 그랬다. 나는 유를 잘 모르겠어서 딸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꽤 오래 같이 살았는데도 나는 정말이지 유를 잘 모르겠다. 여기 앉아서 기다릴 테니 다녀들 오라고 할 때마다 10분이며 20분이며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루하루를 무슨 마음으로 보내는 지도 잘 모르겠다.
한 번은 할머니 곁에 앉아서 할머니처럼 기다려보려고 했는데 핸드폰이나 책도 안 보고 그냥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거진 한 세기 되도록 살아온 사람에게 30분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갈는지 그 반절만큼도 채 못 살아본 나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엄마는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할머니는 둘이 나란히 마주 앉아서도 아무 말 없이 시간을 잘도 보낸다. 어쩌다 한 두 마디 오고 가다가도 금방 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할머니 몸무게만큼이나 가벼운 침묵은 그렇게 가만가만 주변을 맴돌다가 살짝 자리를 비켜주기를 반복한다. 시간이 흘러 흘러 희의 나이가 되고 유의 나이가 되면 나에게도 고요가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