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살던 시절에 난 주는 대로 먹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모친이 솜씨 좋게 해 주셨으니까. 모친은 어떤 음식이든 평균 이상으로 하는 능력자였다. 그러다 보니 반 평생을 '조리를 하는 행위'에 대한 어떤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없다. 으레 식사 시간이 되면 먹을 것이 있었고 그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독립을 해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주중에는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게 대부분이었고 주말에는 둘이 외식을 하거나 시켜먹기 일쑤였다. 한 번씩 솜씨를 부리겠다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도 신혼 주부 놀이에 몸 단 아내였지 난 그저 시키는 대로 거들 뿐이었다. 여전히 ‘조리라는 행위'는 나에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사실 먹는 것 자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배가 부르면 그만이었고 애타게 뭘 찾아먹거나 만들어 먹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다. 줄을 서거나 외진 곳을 찾아가며 음식을 먹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음식이 뭐 별 게 있나 싶었다. 식도락의 가치에 대해 무관심했던 건 주변에서 알아서 해 줬으니 투정 없이 살아온 터였다. 단 한 번도 내가 조리의 주체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조리라는 행위'에 대해 처음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 결혼한 후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심한 몸살감기에 걸렸다. 환자를 위해 약을 사다 주고 간호하는 외에 잘 먹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동네 슈퍼로 달려가 칼국수와 닭을 한 마리 샀다. 언젠가 모친을 거들었던 게 막연히 떠올랐다. 그거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인터넷을 보면서 서툰 칼질로 겨우 손질한 닭을 향신채와 함께 오래도록 끓였다. 어느 정도 익은 닭을 꺼내 살만 발라서 소금과 후추, 마늘, 다진 파,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어 버무렸다. 앙상하게 남은 뼈를 다시 국물에 넣어 마저 끓여내고 면을 삶았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낸 그 한 그릇은 내 생애 최초로 누군가를 위해 한 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맛있게 먹어줬고, 그 국수 때문은 아니겠지만 곧 몸도 회복했다. 돌이켜보면 그 집에 먹을 거라고는 그것뿐이었으니 선택지가 없긴 했지만, 지금도 한 번씩 그 날의 닭칼국수를 말하는 걸로 봐선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다만 그 경험은 내 삶을 뒤흔든 계기가 됐다. '음식'이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다고 처음 여겼고, 자연스레 음식을 만드는 행위도 멋진 것으로 생각됐다. 불가피하다면 내가 나서 요리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꼈고 무엇보다 고생해서 나오는 결과물은 희열을 줬다. 밥이라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닌 정성과 노력을 더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다. 갑자기 요리를 잘하고 싶어 졌다. 자연스럽게 각종 요리 블로거와 올리브 tv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대략 햇수로 8년 정도, 그 이래로 난 주말 주방의 주인이 되었다. 평일에는 너무 해보고 싶은 요리가 있으면 퇴근 후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시간이 넉넉한 주말에 기꺼이 앞치마를 두른다. 맞다. '해보고 싶은' 요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행위라는 걸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했을 건데 싶기도 하다. 말 그대로 인식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요리하는 게 정말 재미있다.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도 이제는 중요시하게 됐다. 좋은 걸 만들려면 많이 먹어봐야 한다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소리였다. 유명한 곳에서는 어떻게 조리하는지, 맛집이라는 곳에서 재료 배합은 어떤지 학습하는 느낌으로 먹곤 한다.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 한순간이 내 인생을 뒤바꿨다. 물론 너무 행복한 방향으로 말이다.
큰 이변이 없다면 가족들을 위해 요리하는 건 계속될 듯하다. 어느덧 그 자체로 즐거운 취미가 되기도 했지만, 사실 이만큼이나 직접적으로 사랑을 전할 수단이 없다. 먹고 싶다는 걸 고민해서 만들고 그걸 맛있게 먹는 일련의 과정은 정말이지 짜릿한 경험이다. 정성껏 선물을 준비했는데 상대가 마음에 들어한다면 기쁘지 않겠는가. 그걸 매주 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행복한 행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