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거기에는 온갖 비밀이 가득하다. 그것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글로 풀어낸 솔직한 마음이다. 또한 일기는 가족을 비롯한 친구와 이성 같은 사람관계에서부터 진로, 직장, 일, 기타 등등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고민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일기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날의 고민을 비워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시 읽어 보고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여 바뀐 것이 있는지 점검하는 발전을 위한 목적이다. 물론 이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목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그냥 적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왜인지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첫 번째 목적으로 일기를 쓸 때면 언제나 '글로 적어보니 고작 이 정도의 고민이었나' 싶다. 머릿속이 엄청 복잡해 다섯 장 정도는 가볍게 넘길 것 같지만 막상 적어보니 다섯 줄도 넘기기 힘들다. 두 번째 목적은 때로는 비참할 정도다. 과거와 비교한 지금도 발전한 것 같지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민의 형태만 달라졌지 '나란 사람은 결국 똑같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기간한정으로 일기를 매일 적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학기 중 매일 또는 (밀린) 방학숙제로, 고민 많던 스무 살 초반, 지금까지는 인생 최악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학 졸업 후, 장교후보생으로 보낸 훈련단 12주. 돌아보니 한결같았다. 강박인가 싶을 정도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하거나 쫓기는 듯한 고민과 이 두 가지에서 묻어나는 솔직하지 못함, 다시 말해 어딘가 가식적인 느낌. 내가 쓴 일기의 전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내가 돌아볼 일기여서 고민하고 깨닫고 발전한 척하는 느낌이다. 그나마 초등학교 시절 일기나 대학 졸업 후 쓴 일기는 조금은 솔직했다.
일기를 쓰는 목적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목적도 거기서 느끼는 감정도 뭐도 아니다. 일기 그 자체다. 그때의 기록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다. 아무리 가식적이어도 결국은 내가 쓴 나의 일부분이고 어쩌면 그때 적은 솔직함이 지금 가식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록 자체가 없다면 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중고등학교 시절이 그렇다. 없다. 간신히 찾아낸 것은 고등학교 때 동아리 활동 중 쓴 에세이와 음악 수업 감상문 정도. 숫자로 나타내면 A4 31줄 양식의 앞장만 채운 7개의 에세이와 1개의 음악감상문. 발표용, 제출용으로 적은 이것이야 말로 가식의 결정체.
혹은 부풀리기일 수도 있다. 아주 작은 경험을 있어 보이게 만드는 과대포장의 일종. 그렇지만 어쨌든 그날의 기록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다시 돌아보니 스무 살 때 보았던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다시 돌아보는 기분이다. 한 번도 이날에 기록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인생최악의 순간으로 꼽을 수 있는 대학 졸업 후였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읽으며 참 어리고 순수했구나 하면서도 지금 나보다 낫다 대견하다 생각했다. 또 스무 살 초반 일기를 보면서는 아직 달라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정말 최악의 순간이라 뭐든 도움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과장을 보탠다면 그때 돌아본 일기가 나를 살렸다. 이것이 아직까지 뭐든 쓰려는 이유이자 8개의 글을 다시 보려는 이유다. 물론 지금이 최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아주 좋은 순간이다.
지금의 나는 고민을 비워내거나 도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기를 돌아보기 위한 목적도 있다. 매년 종종 일기를 돌아보곤 하는데 당연히 같은 것을 자주 보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1년 이상이 지나고 기억 속에서 잊힐 때쯤 다시 본다. 남는 것은 사진이라지만 나에게는 글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다행히 글을 이 정도 가치로 여기는 것을 보니 다행히 아직 여전한 것 같다. 아직 가난한 것 같다.
나는 말을 솔직하게 하는 편은 아니다. 가식이라고 말하긴 했어도 그나마 글로 적은 것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그마저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굉장히 모호한 표현과 다시 보니 이렇게까지 생각할 일인가 싶은 것이 가득하다. 지금 보니 무슨 말을 쓴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을 걷어내려고 한다. 인생을 한 권에 책이라 생각하고 그때가 한 목차가 될 수 있게 그날 자체를 들여다보고 두 번째는 그날을 들어다 봄으로써 더 발전할 수 있도록 고민하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책이 되지 못할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다시 정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현재의 고민을 해결할 열쇠를 줍기를 기대하는 것 하나와 그때에 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점검하려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목적이다. 이것이 아직 변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남은 것을 통해 남길 것을 만들기.
언젠가 다시 돌아볼 이것은 그날과 지금을 담은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꾸준히 똑바로 나아가며
이를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젊은 날의 초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