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기가 너의 집이다.
먼지로 뒤덮인 건물 구석, 하얀 고양이는 몸 붙일 곳 없이 차가운 바닥에서 떨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좁은 케이지안에 잡혀 들어갔다. 영문모를 주삿바늘과 수술. 익숙지 않은 통증과 낯설지만 무서운 소독약 냄새. 날 선 금속소리 가득한 병원 지하 좁은 창살 안에서 스트레스성 방광염이 걸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지가 열리면 칼날이 들어오고 소독약이 쏟아지고 아프고 정신이 잃은 채 다시 케이지로 돌아와야 했다. 며칠 뒤 또다시 무서운 케이지에 들어섰다. 담요에 덮여 밖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덜컹거림이 한참 이어진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고양이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많이 안 아프길...
잠시 후,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곧 케이지 문이 열렸다. 잡아내려는 손이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하얀 고양이는 냄새를 맡고 고개를 내밀고 발 하나를 내디뎌 바닥을 만져본다.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기계소리도 나지 않는다.
차가운 흙바닥 대신 아직은 잊지 못한 따뜻하고 매끄러운 '방바닥'이 만져진다. 조심스럽게 케이지 밖으로 나간다. 편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 집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의 하얀 고양이, 시로는 케이지에서 걸어 나와 우리와 만났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매우 작은 아이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크림이(시로의 구조 이름)는 모모보다 훨씬 큰 아이였다. 시로의 추정나이는 3~4살, 너무 작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렇게 작은 아이는 아니었다.
*TMI : 길 고양이의 나이는 이빨로 추정한다.
놀라운 것은 시로의 행동이었다. 좁은 이동장에서 나온 시로는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빼들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등을 바닥에 두고 배를 보이면서 좌우로 굴렀다. 그리곤 누가 들어도 기분 좋다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고양이의 행동에(모모는 이런 적이 없었다.) 황당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 너도 이 집이 좋구나?,라고 새 식구 맞이에 대한 긴장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이 들었다. 좁은 창살에서 벗어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는 직감이 온 것인지 더 없는 행복에 겨운 몸놀림. 그 순간 해준 것도 없이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아이를 그대로 입양해야겠다고 이때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크림이라는 이름으로 구조된 붙임성 좋은 하얀 고양이는 우리 집에서 시로라는 이름으로 살게 됐다.
처음에는 하얗기 때문에 떡시루 같다고 '시루'라고 붙일까도 싶었지만 이틀 정도 지난 후 '시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로는 일본어로 하얀색이다. 한국어로는 하양이, 무성의해 보였지만 발음이 귀여웠다. 어머니는 전화로 '시루'라는 이름으로 잘못 들으셨는지 그 후로도 한참을 시루라고 부르셨지만...
시로가 처음 왔을 때, 우리 집에 입양이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적응을 보고 우리가 입양 결정을 하면 입양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임시 보호자로서 다른 집사 후보가 나타날 때까지 잘 데리고 있다가 보내는 것. 이것을 '입양 전제 임보'라고 한다.
나는 처음으로 고양이를 입양하려는 사람들에게 '입양 전제 임보'를 추천한다. 물론 다들 잘 기르겠다고 다짐하고 시작하겠지만 처음 고양이의 부모가 될 때에는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고양이의 적응이다. 고양이가 무조건 그 집에 잘 적응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강아지에 비해 자기 의사가 분명한 고양이는 환경에 따라서 행동과 성격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적응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숨어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성격이 예민해져서 사람과 적응이 안될 수도 있다. 사랑으로 보듬어 주려고 아이를 입양했는데 도통 감정교류가 안된다면, 특히 처음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에게도 큰 상처가 될 수가 있다.
두 번째는 알레르기 반응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 잘 치우면 되겠지라는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하다. 눈은 충혈된 채로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재채기를 반복한다.
세 째는 고양이와 내가 얼마나 잘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늠이다.
사람과의 동거만이 아니라 고양이와의 동거에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밥과 물을 주고 청소를 해주고 화장실도 치워줘야 한다. 심심한 아이를 위해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잠든 아이 옆에서 평화를 지켜주기도 해야 한다.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건 예상과 늘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특히 아프기라도 하면 대화를 할 수도 설명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장인어른은 처음에 우리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반대하셨었다. 식구가 늘면 사랑만큼 걱정도 늘고, 우리의 걱정이 늘면 장인어른의 걱정도 는다. 우리가 그저 평화롭기만 바라셨기 때문에 반대를 하셨지만 지난번과 다르게 아내는 이번엔 자기 고집을 부렸다.
그 외에도 아이와 고양이와의 관계라든가 공간 등의 이슈로 생각보다 고양이 입양 직후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임보를 하면 고양이의 적응이나 성격, 알레르기 등을 알 수가 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좋은 부모를 찾아주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고 집사도 행복한 방법이다.
하지만 덜컥 입양해놓고 여러 크고 작은 문제로 일방적인 파양을 하는 집사가 많다.
그래서 입양 전제 임보, 임보를 통해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큰 문제가 없는지 혹은 아이들과의 이슈는 없는지 살펴보기를 권한다.
보통 임보를 하게 되면 고양이를 키우는 데에 필요한 도구 등이 부족한데 구조자나 단체에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중성화 비용, 검진과 예방접종 비용, 초기 도구 지원 등을 해준다. 우리의 경우에도 구조자님이 시로의 검진비용과 초기 병원비용을 지원받았고 그 후에 스크래쳐나 밥그릇, 사료 등을 지속적으로 선물해주셨다. 물론 시로는 유독 많은 지원을 받은 편인데 우리는 그때 그 사실을 몰랐다. 고양이 집사도 초보였지만 임보도 입양도 초보였으니까...
그래서 필요한 비용이 있으면 단체에 요청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기회 나는 대로 갚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당시 구조자님은 흔쾌히 많은 지원을 해주셨다.
시로는 우리 집에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간 머무르면서 입양을 결정하거나 부모를 찾아주게 되었다.
한 달 정도 데리고 있으면서 정말 입양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 다르게 구조자님 입장에선 이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는 게 급선무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하니까.
시로가 집에 온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카페에 시로 홍보글이 올라갔다. 우리가 찍어서 보내준 귀여운 시로의 사진이 시로의 집사 찾기 홍보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 시로를 키우기로 마음먹었지만 망설임 2%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양 홍보글에 2%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됐다.
우리 집에 있어도 될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는데, 이 아이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 없었다.
"자기가 결정해. 어떻게 할까?",라고 아내가 물었다.
"난 첫날부터 결정했어. 얘는 우리 아이야.",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시로의 입양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