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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발이 Jul 29. 2020

매콤한 감칠맛은 농염하다. 볶음 고추장

엄마의 레시피


2004년 5월부터 1년 동안은 원 없이 비행기를 탔던 시기다. 영국 다음에 브라질로, 스페인-모로코 한 묶음으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인도, 방글라데시, 칠레, 페루 등등등 정말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게 다녔던 2004년이었다. 이때 현지에서 만난 교민들에게 한결같이 들었던 질문이 하나 있다.


혹시 볶음 고추장 없으세요?

어렸을 적 친정에 다녀온 엄마의 걱정 중 하나는 고추장이었다. 곱디고운 외모와 심성의 외할머니를 닮아서인지 외할머니가 담근 장맛은 순하디 순한 고운 맛이었다. 그래서 충주 친정에 다녀올 때면 엄마는 외할머니가 양껏 싸준 맛난 장을 담아오는데, 서울에 오면 늘 고추장이 말썽을 부렸다.

외할머니-엄마 고추장 레시피 
고추장용 마른 고추를 곱게 간다(태양초는 색이 곱다) (10)
찹쌀가루를 고춧가루 양에 비례해서 곱게 빻는다 (5)
 길금(3) 물을 넣고 면자루에 거른다
 길금 거른 물에 찹쌀가루를 푼다(2시간 정도 삭힌 후에 끓인다)
찹쌀가루  물을  불에 끓인다(묽은 조청  때까지, 10리터가 7리터  때까지)
시판 조청으로 하면 고추장이 까매지고, 딱딱해지고,  맛이 난다
차게 식은 묽은 조청에 고춧가루를 조금-조금, 스텝 바이 스텝,
적당히(너무 되지 않게) 푼다
굵은 천일염 간을 봐가며 적당히-짜지 않게 넣는다
 다음에 오지 재래식 항아리에 담근다
담근 후에 왕소금을 첫눈 오듯이 뿌려 놓는다
50 정도 있으면 익는다 (보통 , 가을에 담근다)
가을 고추장, 햇고추로 담그면  맛있다 (여름 고추장은  끓어오른다)
더운 날씨보다 선선한 날씨에 익히면  맛있다

순하고 감칠맛 충만한 고추장이 서울 집에만 오면 사달이 났다. 봇짐을 풀라치면 빨갛고 끈적한 놈이 부글부글 끓어 넘쳐 있는 것이다.
‘두부와 와인은 여행을 시키지 마라’는 말처럼 고추장도 여행을 싫어하는 놈이었나? 근데 두부나 와인은 장거리 이동할 때 변하기 쉽다고 치자. 천일염이 듬뿍 들어가고 매운 태양초 가루가 주재료인 고추장이 웬만한 이동에 상할리는 만무한데, 왜 부글부글 끓어 넘쳐 엄마의 속을 부글대게 만들었던 걸까? 된장, 간장 다 말짱한데 도대체 고추장만 왜?

엄마 피셜 고추장이 끓는 이유
 1)  길금 물을  달였을 
 2) 50일이  안된, 완전히 숙성되지 않은 고추장을 퍼왔을  날고추가루 냄새가 나며 끓어오른다
 3) 소금간이 약했을 때도 끓어오를  있다

 4) 여름에 담근 고추장은  끓어오른다

밥상의 센터는 고추장이다. 집고추장


      

보통 엄마가 나를 데리고 외가에 가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여름에 담근 고추장이 끓기 쉽기도 하거니와, 사랑하는 큰 딸이 친정에 온다고 하니 외할머니는 햇 고추장을 담그셨을 거다. 게다가 슴슴한 맛을 즐기시는 평양 출신의 외할머니는 고추장을 담그실 때 소금 간도 많이 안 하셨을 거다. 고추장이 끓기 쉬운 조건을 제법 갖춘 셈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고, 더운 여름을 견디기에 외할머니의 고추장은 너무 순하고 고왔던 셈이다.
고추장이 계속 끓어 부글대면 엄마는 정육점으로 향한다. “소고기 홍두깨살 1근 갈아주세요”.

와우! 볶음 고추장이다.

엄마 볶음 고추장 레시피 확인
완전히 숙성된 고추장에 1/5 정도 물을 넣는다
(다시마, 무, 국물멸치 육수를 물 대신 사용하면 더 맛나다)
곱게 갈은 소고기 사태살 (고추장 양의 2/3)
갈은 사태살을 먼저 ‘두꺼운 냄비’(포인트)에 살짝 익힌다 (기름 없이)
물을 넣은 고추장에 살짝 익힌 고기를 넣는다
중간 불에 나무주걱으로 어우러질 때까지 저어준다 (젓가락으로 떠질 정도 되직하게)
불을 끄고 적당량의 꿀을 넣고, 칼로 거칠게 다진 잣을 넣는다 (조청 넣으면 까매진다)
맨 마지막에 참기름을 적당량 넣고 저어준다

볶음 고추장은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우선 갈은 소고기와 고추장의 비율이 중요하다. 소고기가 너무 적으면 헛헛하고 많으면 뻑뻑하다. 다음은 볶는 사람의 정성이다. 고추장이 타서 쓴맛을 내지 않게 성심성의 껏 저어주어야 한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하나 있는 선풍기는 가족에게 양보하고 불 앞에서 뻑뻑한 고추장을 계속 저어주는 일은 보통 노력이 아니다.


완성된 볶음 고추장은 만든 직후 한 김 식혀서 먹을 때가 최고다. 미지근한 볶음 고추장을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서 쪽 빨아먹는 맛은 육감적이다. 육즙 머금은 고추장의 육감적인 매콤함이 달달하게 숙성되면 농염한 맛이 된다. 농염해진 볶음 고추장을 흰쌀밥에 슥슥 비벼먹는 맛은 참기름 한 방울이 더해지는 순간, 끝이다. 어쩌다 들 갈아진 왕건이 소고기라도 고추장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은 희열의 극치다.

볶음 고추장은 만능 양념장이다. 갖은 나물 얹은 후 볶음 고추장 한 수저 더하면 멋진 비빔밥이다. 볶음 고추장을 베이스로 야채와 햄을 떼려 넣고 끓이면 최고급 민찌가 들어간 부대찌개가 된다. 볶음 고추장으로 어묵을 볶으면 최고의 밥반찬 매콤 소고기 어묵 볶음이 된다. 오이 한 조각 볶음 고추장에 '푹' 찍어 베어 물면 최고의 막걸리 안주다.  그렇게, 순해서 끓어오르던 외할머니의 고추장이 엄마의 정성을 만나 밥상의 팔방미인이 된다.


된장, 간장이 숙성된 중년이라면 고추장은 열혈 청년이다. 뜨거운 열기를 만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끈한 열정의 맛이다. 고추장은 그래서 좋고, 그래야 한다. 어차피 청춘은 한 때이고, 소고기라는 멋진 파트너를 만나 함께 볶아지면 성숙한 맛이 되니까. 아!!! 참!!!

요즘은 끓어오르는 고추장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대기업의 시판 고추장 덕분이다.
설탕이라는 천연 방부제가 제법 들어있어, 유통도 쉽고 보관도 편해진 대기업 시판 고추장은 부글댈 줄 모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같은 표정, 같은 맛이다. 박제된 고추장이다. 끓어 넘치지도 않고 곰팡이도 피지 않으니 볶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난 시판 고추장이 별로다. 참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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