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이런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
속 좁고 옹졸한 사람을 비유할 때 수시로 등장하는 밴댕이다. 밴댕이는 잡히자마자 네댓 번 팔딱팔딱거리다 요단강을 건너 버린다. 그만큼 성질이 급하니, 속도 좁을 거라며 얄팍한 인간들을 밴댕이에 비유한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한국 연안의 생선 중 크기로는 1,2위를 다투는 민어와 삼치도 잡히자마자 죽는다. 민어와 삼치 활어회가 없는 이유이다. 그뿐이랴. 갈치, 꽁치, 준치 등 '-치'자 붙은 생선과 고등어, 전갱이 등 빠르게 헤엄치는 회유성 어종들도 성질 급하기로는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속 좁은 인간들을 오로지 밴댕이만 감당하고 있다. 밴댕이가 안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다.
밴댕이는 맛도 좁지 않다. 넓고 깊다. 한 마리를 통으로 포를 뜨는 밴댕이 회는 고소함으로 따지면 넘버 원이다. 통으로 포를 뜨니 살집도 넉넉하고 씹는 맛도 있다. 씹다 보면 단맛도 찾을 수 있다. 고소함과 단맛이 있으니 회무침으로 해도 맛이 양념에 묻히지 않는다. 기름진 고소함에 부담감이 있다면 회무침이 안성맞춤이다. 밴댕이는 살이 기름져 빨리 상하기 때문에 잡자마자 얼음을 잔뜩 뿌린다. 저온 숙성이다. 단백질은 저온 숙성과정에서 감칠맛을 얻는다. 고소함, 단맛에 감칠맛까지. 회맛으로만 따지면 솔직히 민어보다 윗길이다. 구이도 좋다. 전어구이의 맛에 뒤지지 않는다. 굵은소금 툭툭 쳐 구우면 집 나간 며느리에 사위도 돌아올 판이다. 요즘 사람들은 몰라도 옛 어르신들은 밴댕이의 진가를 알았다.
밴댕이의 한자 이름은 소어(蘇魚)이다. 조선 시대에는 소어소(蘇魚所)를 설치하여 밴댕이를 전담 관리하게 하였다. 임금님 진상에 차질 없이 하라고. 세종 11년(1429년)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줄 선물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1592년 5월 21일 자)를 보면 고향 집에 불이 난 어머니를 걱정하며 전복, 어란과 밴댕이를 보냈다고 적혀있다. 밴댕이가 이 정도였다. 근데 쉽게 상한 다는 밴댕이를 어떻게 멀리 보냈을까? 밴댕이젓갈이 있다. 좋은 소금으로 잘 절여진 밴댕이젓만 한 밥도둑도 없다. 임금님 반찬 목록에도 '소어해'라고 밴댕이젓갈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임금님이 맛있다면 서민들도 맛있을 터, 20세기 들어 밴댕이는 서민들의 안주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인천 북성동의 '수원집'을 필두로 한 '밴댕이 골목'이나 연안부두의 '밴댕이회무침 거리'가 그곳이다. 60년이 넘는 업력의 수원집은 항만 노동자들의 선술집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밴댕이 골목에서 잔술 한잔과 뼈째 썰어낸 밴댕이 회로 고된 노동의 하루를 씻어냈다. 그렇게 세월을 넘어 현재에 이르렀다. 서민들의 입맛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지면서. 값이 싸기에 가능한 일이다. 맛도 좋은데 값까지 싸다니. 이토록 대범한 생선이 어디 있었던가. 속 좁은 인간들은 통 큰 밴댕이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외모가 작다고 깔보는 건 인간이나 할 수 있는 천박한 짓거리다. 밴댕이는 임금이나 서민이나 가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히 맛있다.
밴댕이는 냉장 유통되고, 제철을 지나면 냉동 보관하기 때문에 회나 구이로 먹으면 어디서나 맛에 큰 차이가 없다. 회무침의 경우는 식당마다 양념맛의 편차가 있지만, 밴댕이의 짙은 살맛 덕분에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한다. 인천역 부근 북성동의 밴댕이 골목은 노포 기운이 물씬하니 분위기가 더해지고, 연안부두 회무침 거리는 낙조와 함께할 때 운치가 더한다. 강화도도 좋다. 강화풍물시장 2층은 밴댕이 회타운이다. 40여 개의 식당이 밴댕이를 다룬다. 가성비가 좋다. 3인이 5만 원으로 회와 회무침, 구이에 식사까지 배부르게 즐길 수 있다.
프리랜서 피디가 되고 나니 좋은 점이 있다. 시야가 넓어지고 공손해졌다. 예전에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는 말 꽤나 들었다. 회의를 하거나 촬영을 나가서 내 뜻대로 안 되면 꽁하니 토라져서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었다. 억울했다. '내가 CP(책임피디)고 부장인데 왜 말을 안 듣지'. 지금 보니 옹졸했다.
졸렬해도 방송사라는 허울이 있으니 동료들이 이해하고 넘어갔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 아무도 나와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속 좁은 나를 버려야 했다. 넓게 보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면 내가 버려진다. 프리랜서의 숙명이다. 이제는 누가 나를 밴댕이에 비교해 주면 감사할 일이다. 내가 넓고 깊은 맛의 밴댕이라니.
밴댕이를 한자어인 소어(蘇魚). 여기서 소(蘇) 자는 '되살아나다', '소생(蘇生)하다'의 뜻이다. 한자어를 풀이하면 밴댕이는 맛만 좋은 게 아니라 지친 몸도 '되살리는' 고마운 생선이 셈이다. 바로 지금. 5,6월이 밴댕이 제철이다. 산란을 위해 먼바다에서 서해 연안으로 몰려오고 있다. 은빛 반짝이는 밴댕이로 지친 몸을 되살릴 절호의 기회다. 임금님이, 명나라 황제가,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그러했고, 산업화의 고단함을 짊어졌던 어르신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밴댕이를 탐할 때이다. 언제나처럼 밴댕이의 넓고 깊은 맛은 우리를 맛있게 감싸주리라. 소갈딱지라는 오명을 인간으로부터 덮어쓴 밴댕이는, 실로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