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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수 Jan 23. 2023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생각들 (2)

자라나는 과정

씨앗을 심었다.

이 까만 점 속에서 과연 싹이 나올까? 보잘것없는 씨앗만 봐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여러 번 기적과 같은 현상을 경험했던 마음은 어김없이 새싹을 기대하며 씨앗을 심게 된다. 하물며 그 씨앗은 한 해가 지나면 걷잡을 수 없는 곁가지를 내서 작은 화분으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식물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뿌리지도 않은 식구들이 새싹옆에 옹기종기 모여 돋아나서 어느 싹이 내가 심은 싹인지 구별이 안 가기도 한다.


물을 주고 온도가 따뜻하게 올라가면 어김없이 하얗게 실지렁이 굵기로 하찮아 보이는 싹을 올리는 씨앗은 처음엔 속 터지게 자라는 듯 보인다. 그런데 문득 새 잎이 돋고 이제 떡잎이 생겼네 언제 줄기가 나오나? 하면 어느새 줄기가 나와서 한잎 두잎 세잎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장맛비가 내리고 나면 훌쩍 자라 버린 새싹은 새싹이 아니라 감당 안 되는 식물의 사이즈로 커버려서 이제는 어디를 잘라줘야 열매를 잘 맺을지 고민하게 된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계속 느낄 수는 없다.

며칠 인내심을 가지고 봐야 자란 걸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성장 모습도 그런 과정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얘를 어쩌면 좋아...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지금은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까?

이렇게 저렇게 공부시킨답시고 공부시키지만 늘지도 않는 것 같고 성실하지도 않으니 맥이 빠진다.


이런저런 말끝에 선택한 미적분은 아이 말이 맞아서 하던 진도를 계속 나가게 되었다. 다행인지 아닌 건지 모르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허탈감은 막은 셈이었다.

문제가 길지 않아서 간단하게 풀릴 거 같아서 노력은 하지 않지만 수학공부 요령이 좋아 선택한 미적분이 이제 1단원이 끝나고 2단원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면 벌써 2단원 끝내고 3단원도 에지간히 끝나갔을 텐데 이 녀석은 하루하루 수업하는 모습이 까만 씨앗에서 새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바라보며 가르쳐야 한다.


'띵동~'

이 녀석이 올 시간이다.

문을 열면 뻔하다

'저 오늘은 어디가 ******'

***** 부분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창작이 필요한 부분인데

'배가 아파서...'

'머리가 아파서...'

'콧물이 나서...'

'골치가 아파서...'

'운동을 많이 해서 피곤해서...'

'잠이 안 깨서...'

'친구들이 기다려서....'

'배가 너무 고파서....'

'배가 너무 불러서...'

'잠이 부족해서...'


처음엔 들어주고 엄마한테 전화까지 했었다. 그건 중학교 때... 그땐 엄마도 같이 걱정돼서 수업을 일찍 끝내주기도 했다. 그다음엔 야단을 쳤다.

그런데 요즘엔 얘가 어디가 아프다 어떠하다 저 떠하다 이야기하면

'아이고 어쩌니 아파서... 피곤해서... 우리 jj가 힘들어서 큰일이구나... 오구 오구 그래 그럼 수업하자'


놀리는 듯 얼르는 듯... 그냥 이 녀석의 말을 듣고 즐기고 대답도 즐겁게 해 주기로 했다.

이편이 훨씬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그냥 공부하기 싫은 응석 같은 상황으로 받아준다. 그럼 좀 비비작 거리다가 꾸역꾸역 공부를 한다.

그렇게 조금씩 가랑비에 흙이 촉촉해지면서 싹이 나듯이 이 녀석은 자라나고 있는 것 같다.

언제 사람이 되나 했는데 문득 고3 문턱에 올라서니 목까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 머리까지 사람꼴을 갖추려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띵동~

벨이 울려 문을 열고 이 녀석을 맞았다.

오른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눈이 아파서...'

'눈이 아파? 와... jj야 창의적인데... 새로운 걸 찾아냈구나!'


수업 내내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이 녀석이 연신 비벼대는데 비벼서 빨간 건지 진짜 아픈 건지 비비지 말라고 잔소리하고는 보다 못해서 눈꺼풀을 들고 들여다봤지만 보일리가 없다.


'비비지만 말고 남은 눈으로 문제 보고 수업하자... 보이잖아'

'아... 한쪽눈으로 보려니까 집중이 안돼요'

'어련하실라고... 그래도 jj는 할 수 있어... 눈 하나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쪼금만 쪼금만 하면서 그래도 목표량의 2/3을 했다.

살짝 속으로 걱정도 되었다. 오른쪽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얘가 말한 핑계 중 제일 그럴싸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보내면서 눈에 눈썹 아니면 뭐가 들어간 게 분명하니 꼭 안과 가서 빼라고 했는데 안 간다고 집에 가서 자면 나을 거라고 까불더니 결국 가는 도중 아파서 안과를 갔다고 했다.


축구하다 들어간 작은 돌멩이가 있었다고...


다음에 와서 훈장하나 달은 것처럼 안과 갔던 무용담을 털어놓는다.

그러더니

'지난번 눈 아픈 거 진짜니까 오늘 조금만 공부해요...ㅋㅋㅋ'


웃는 걸 보니 너도 어이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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