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평 구옥빌라에서 2023년 신축 민간임대 아파트까지
얼마 전 고향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방을 구해야 하는데 자기는 서울 물가나 지리도 잘 모르고 자취도 해본 적이 없으니 자취 생활로 글도 쓰는(?) 내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1월이면 새내기들 한창 집 구할 시즌이고 한 발 늦으면 그나마 괜찮은 집들은 다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나 역시 피차일반 직방이나 피터팬으로 알아봐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재학생들만 볼 수 있는 자취방 거래 게시판도 접속해 같이 방을 찾아줬다. 학교 앞의 5-7평 원룸 매물들을 보며 속으로 깜짝 놀랐다.
‘월세가 왜 이렇게 비싸?’ ‘근데 왜 이렇게 방이 작아?’
보증금 시세는 최소 1000만 원, 월세가 50~60만 원인데, 사진만 봐도 이 공간의 단점이 느껴졌다. 8년 차 자취인의 짬이랄까. 창문이 없어서 환기가 안 될 것이고, 사진으로도 누런 벽지 뒤에는 곰팡이가 피어있겠지. 이어폰 없이 유튜브라도 크게 틀어놓고 볼라치면 옆방에서 쿵쿵 벽을 칠 것이다. 친구의 동생에게 실제로 집 보러 가면 체크해야 할 것들을 성심성의껏 알려줬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집은 구하기 힘들 것이다. 학교가 가깝고 컨디션 좋은 자취방은 이미 복학생들이 선배에게 물려받아 매물로 쉽게 나오지 않고, 유튜브로 공부를 하고 간다고 해도 실제로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르는 것들이 있으니까.
8년 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의 도움은 최대한 받고 싶지 않아서 보증금이 낮은 곳부터 알아봤다. 당시 2호선 을지로입구역으로 출근해야 했기에 내 조건은 직주근접이 최우선이었다. 2호선 라인을 뒤지고 뒤졌지만 물어보는 곳마다 보증금이 1000만 원부터 시작했고, 500만 원 이하로는 지하철역과 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구한 첫 집은 이대와 신촌 사이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 실평수 5평 남짓한 구축 빌라였다. 보증금 300, 월세 37만 원에 관리비 5만 원 별도(무엇을 관리해 주셨던 걸까?). 당시에도 저렴한 시세였다.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컨디션을 보고 놀랐지만 수중의 예산에서는 그 집이 최선이었다. 그나마 역과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고,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컨디션이 뭐 그리 중요할까, 짐 놔두고 잠만 자는 공간인데 뭐~ 하는 젊은 패기였달까.
부족했지만 뿌듯하고 행복했다. 조립식 2단 행거에 아웃렛에서 산, 누가 봐도 사회 초년생스러운 정장을 잘 다려서 걸어두고 출근 준비하는 내 모습이 나름 멋있었다. OTT 서비스의 개념이 없던 시절, 퇴근하고 나서 혹은 주말에 노트북에 영화를 다운로드해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내 발로 직접 구해 내 힘으로 월세를 내는 자취인의 삶. 가족들 눈치 볼 것 없이 나만의 공간을 무한히 즐길 만큼 시간도, 자유도 넘쳤다. 연고 없는 대도시에서 사회 초년생의 서울 살이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아서 우울하고 씁쓸한 시간 역시 낡은 자취방에 뒤섞여 있었지만 오늘은 집 이야기에만 집중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선택의 책임 역시 내 몫이었다. 예산에 맞춰 들어간 집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집이 좁아서 싱크대와 매트리스가 맞닿아 있는 구조로 매트리스를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우면 못생긴 싱크대가 보이는 게 싫어서 다이소에서 색지를 사다가 나름 꾸며보려 애도 썼다. 하지만 더 흉물스러운 싱크대가 탄생해 나는 집 꾸미기에는 소질이 없음을 빠르게 인정했다. 혹시 세탁기가 화장실 안에 있는 집에 살아본 사람이 있는지? 세탁기 물 빠지는 호스도 없었던지라, 빨래라도 돌리면 참방거리는 물바다 위에서 세수하고 이를 닦아야 했다. 겨울엔 또 얼마나 추운지, 단열이란 개념을 잃어버린 집에서 뽁뽁이와 따수미텐트 등 온갖 자취 난방템으로 서울의 혹한기를 견뎠다. 입사하자마자 해외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 평균 2주에 1번은 20kg 캐리어를 좁디좁은 구옥 계단에서 1층부터 5층까지 실어 날라야 했던 건 차라리 귀여운 에피소드였다. 방음이 안 돼서 야근하고 돌아와 옷 벗을 힘도 없이 널브러져 있으면 옆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대학가라 그런지(?) 매일같이 들려왔는데, 그렇게 빡칠 수가 없었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다!!
그 집에서 무려 1년을 살고, 1년 더 연장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을 더해 전셋집으로 옮겼다. 내 모든 짐을 남의 집 현관문에 쌓아두고 2주간 친구집, 친척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로 시작한 전세 이사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한 유튜브에서 자취 초보에게 제일 위험한 어플이 ‘오늘의 집’이라는 말을 보고 공감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자취방은 너무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내 현실은 당장, 숨만 쉬어도 나가는 보증금, 월세, 관리비 기타 생활비 등을 충당하는 것도 벅차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시작은 부족한 게 정상이다. 모자라게 시작해서 경험을 쌓아가는 재미가 있더라. 나 역시 보증금 300만 원짜리 집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전세’라는 개념을 처음 찾아보게 됐던 것처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신축 민간임대 아파트도 집 고르기에 실패해 보고,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집을 알아보면서 한 단계씩 나아가며 만나게 된 집이다. 이 글을 단칸방에서 읽고 있을 사회 초년생들에게 나의 첫 자취방 이야기가 작은 공감을 불러왔기를, 또 나의 현재 이야기가 당신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