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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y Jan 06. 2021

담임 선생님 집으로

개똥 철학자의 가출 (7)

나의 첫 홀로 여행은 치악산 정상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고 급 대 전환을 맞았다. 막상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당시 가출을 했던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학교에서 좀 껄렁하던 친구들의 전매특허였다. 며칠씩 가출 후 돌아와 학교에 나오면, 그날은 타작의 날이었다. 당시 남자 고등학교의 남자 선생들은 폭력도 교육이라는 착각을 했었다. 무차별 따귀이던, 특별 제작된 '사랑의 매'라 쓰인 흉기로 맞는 허벅지이건 가출의 끝은 또 다른 가출을 부르는 폭력으로 귀결됐었다. 이렇게 돌아가면, 내 존엄을 무너뜨리는 몽둥이 세례를 받고 이 의미 있는 여행이 다시 무의미하게 돼 버릴 것 같았다.


'일단 서울로 가자!'


치악산을 내려와 원주 기차역으로 향했다. 수중에 몇 천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표 값이 가장 싼 청량리 행 비둘기호 열차가 다음 날 새벽에 있었다. 당시 비둘기호 열차의 표 값이 참 착했다. 얼마나 쌌던지 내 남은 돈으로 서울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 어렴풋한 기억에 요금은 700원 정도. 당시 서울 시내 전철 요금이 1구간 250원, 2구간 350원 할 때니, 전철 왕복 값으로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올 수 있었던 교통수단이다. 10년 정도 시간이 흘러 비둘기호 열차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나같이 주머니 텅 빈 방랑자가 그나마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는데...


표를 끊고 처음으로 노숙을 했다.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내에서 밤을 보냈다. 이른 아침 첫 비둘기호 열차는 활기가 있었다. 학교에 가는 학생들의 통학 열차였고, 새벽잠 없는 노인들을 옆 동네로 실어다 주는 오래된 친구였다. 원주에서 청량리까지 1호선 전철처럼 중간중간 모든 역들에 정차하며 열차는 느릿느릿 서울을 향했다. 서울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아침이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왕 월악산, 치악산으로 '악'자 돌림 산을 찾아다닌 김에 '악산' 하나 더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엔 '관악산'이 있지 않던가. 어떻게 올랐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산들처럼 꾸역꾸역 네 발로 기어올랐던 것 같다.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어떻게 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지 오만 생각이 들었다.


'담임 선생님 집으로 가자!'


그 시절엔 휴대폰도 삐삐도 없었다. 공중전화에 20원을 넣고 2분인가 한 통화를 하던 때다. 담임 선생님의 집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집에 찾아갈 수 있을까. 수중엔 이제 몇 백 원 정도의 돈이 남아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114로 전화를 해서 학교 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전화를 해서 2-1반 조 OO 선생님의 집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 시절엔 개인 정보 보호니 하는 법 따위 없었으니 물어보면 다 알려줬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 집에 전화를 하니 사모님이 받았다.


"선생님 제자인데, 선생님은 언제 퇴근하시나요?"


"저녁 늦게 들어오실 거예요. 제자 누구라고 전할까요?"


"아, 네... 제가 저녁때 다시 전화드릴게요. 아. 사모님, 혹시 선생님 댁이 어디쯤 이신가요?"


그때만 해도 졸업한 제자들이 선생님 집으로 종종 선물을 사들고 찾아오곤 했던 시절이다. 대략적 집주소를 알아내고 그쪽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알려주신 잠실 어느 동네의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해가 지도록 기다렸다. 이미 수중에는 5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고 동호수는 몰랐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마지막 동전을 넣고 공중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아직도 선생님은 퇴근 전이었다. 한번 더 통화를 해야 했다. 당시 공중전화기는 50원 동전을 넣으면 30원을 돌려주지 않고, 재발신 버튼을 눌러 한 통화를 더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공중전화기에 남은 돈 30원을 다음 사람이 써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동전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출처 : '응답하라 1994' 3화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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