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외국 생활
미국에 온 지 벌써 반년이 되었다.
스무 살 때 휴학을 하고 영국에 계신 고모 집에서 몇 달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처음 겪는 외국 생활은 서툴고 낯설었지만, 내내 설레고 즐거웠다. 내게 익숙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며 내 삶의 많은 것이 변화했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지던 날, “10년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고, 20년이 지나 미국에서 그 말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남편의 파견 근무를 따라 두 아이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6개월. 초등학생 첫째 J는 영어 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지만, 다섯 살 둘째 H는 알파벳조차 모르는 상태로 이곳에 왔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도전일지 걱정도 됐지만, H도 20년 전의 나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내심 믿었다.
H는 집 근처 프리스쿨에서 2개월을 보낸 후 9월, 누나가 다녔던 학교에서 킨더가든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H의 첫 소풍 일정이 학부모 앱에 공지됐다. “엄마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라는 말에 나는 자원봉사자*로 참여 신청을 했다. H가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드디어 소풍 당일,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진 날이었다. 목적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호박농장으로 미국에서 호박농장 체험은 한국의 '대하와 전어구이 먹기'처럼 가을철의 전통적인 계절 문화라고 한다. 친구들과 학교 캐릭터가 그려진 파란 맞춤티를 입고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농장에 도착한 H는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H와 아이들은 함께 점심 도시락을 먹고, 농장에서 식탁까지 농산물이 전달되는 과정을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고 소젖을 짜서 콘브레드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배웠다. 그리고선 전통적인 호박농장 놀이인 건초 타기와 동물 먹이 주기를 하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H는 집에서 늘 이야기하던 두 명의 남자친구와 장난치고 웃기도 하고, 몇몇 여자친구들은 어리바리한 H를 누나처럼 챙겨주었다. 2열로 선 5세 꼬맹이들의 단체사진 촬영시간이었다. 앞줄 맨 왼편의 H가 세상 환한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해맑고 걱정 없는 표정은 말하지 않아도 “엄마, 나 잘 지내고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고 그 순간 마음속에 안도와 감사의 마음이 차올랐다.
마지막 활동은 아이들이 각자 호박을 고르기 전, 선생님이 준비한 실험이었다. 커다란 호박과 벽돌의 무게를 비교하고, 더 크고 무겁지만 물에 뜨는 호박의 비밀을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왜 호박이 물에 떴지요?”라고 질문하셨고, 한 아이가 “호박은 무거워서요!”라고 외쳐 모두를 웃게 했다. 또 다른 아이가 “공기요!”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호박 속 비어 있는 공간에 손을 넣으며 이 덕분에 호박이 물에 뜰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밀도와 부력의 개념을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하고자 하셨겠지마는 그 순간 나는 삶에 있어 비어있는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벽돌처럼 다져지고 압축된 것들은 가라앉지만, 호박 속처럼 포슬거리고 여유 있는 공간을 품을 수 있다면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 해도 두둥실 떠올라 유영하며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풍이 끝난 후, 선생님은 H가 고른 호박을 건네주시며 엄마와 함께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학교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다. H는 친구들과 학교로 돌아가 스쿨버스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아이의 적응과 성장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완벽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20년 전 그때처럼 설렘과 즐거움을 품고 이 새로운 여행을 이어가야겠다고.
* Chaperone(샤퍼론)은 소풍에 가서 이동이나 활동 중에 아이들을 돌보고 안전 관리 등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주로 학부모가 참여한다. 프랑스어 ‘chaperon(머리나 어깨를 덮는 두건)’에서 유래했으며 중세 시대에 두건을 쓰는 사람이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데서 보호자라는 뜻으로 확장되어 18세기부터 ‘어린 사람을 보호하고 돌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