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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현 Jan 12. 2024

낮은 확률을 높이는 나의 방법

어린이집 조리사의 면접 이야기

내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에서

내가 이직할 특정 시점에 나를 뽑아줄 확률은 극히 낮아 보였다.

그 낮은 확률은 어떻게 내게 일어났을까?



나의 이력서는 이러했다.


30대 초반까지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로 7년간 일함

2012년부터 여러 전문 음식점 주방에서 9년간 조리

한식, 양식 기능사 자격증, 조리사 면허증 있음

2020년도 ㅇㅇ어린이집 입사 현재 재직 중

우수조리사 공모전에서 우수상 수여


'아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어쩌고 하는 이런 문구는 쓰지 않았다. 대신

"조리 외에도 급식에 관한 모든 업무처리 가능하고,

아이들의 요리활동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가끔 샘들 간식도 맛있게 해 줍니다."


서류를 메일로 보낸 지 3시간 만에 연락이 왔고 바로 면접을 잡았다.


한글이름을 가진 원장은 예상했던 대로 젊었다.

이력서를 다시 보고 있는 면접관 앞에서 그의 정수리를 보고 있는 시간은 여전히 어색했다.

나는 증명사진 이야기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래사진인 지금과 많이 다른가요?"

"아니에요."

"합격률이 높은 사진이라 많이 달라지지 않으려고 애는 쓰고 있는데..... 요번에도 행운이 따라줄지 모르겠네요."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나이보다 아주 젊어 보이신데요....."


마실 차를 내려놓고 자리를 같이 한 사람은 원감이라고 소개했다. 

젊은 원장보다 더 젊은 듯했고, 내가 알고 있던 원감의 이미지와는 아주 달랐다.

사실 국공립어린이집의 원감이란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고된 실무자의 직함에 불가한 것이다.


 내가 궁금할 거라 생각했는지 원장은 2월에 계약만료가 되는 현재 조리사의 교체이유를 설명했다.

"내년에는 정원이 다 모집될 거고요.... 

6월쯤 평가인증제가 있어 주방을 책임질 조리사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계시는 분은 역량이 부족하셔서요."

(평가인증제는 개원한 국공립 어린이집이 1년 안에 아주 엄격한 평가를 거쳐 등급을 정해주는 제도임)

보육교사도 아닌 조리사가 왜 1년도 아니고 다음 해 2월까지 근로계약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대부분 서명을 한다. 이건 일종의 수습기간이면서 원장의 입장에선 조리사의 연차휴가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국공립 어린이집에만 오래 근무를 했고 원감을 거처 원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주방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맡아할 순 있는데요, 믿지는 마세요. 믿으시안 돼요."  

 말에 원장은 허탈한 듯 웃었다.

발주등 세부업무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는 면접의 마무리 인사를 했다.

"원장님, 충분히 면접을 보시고요... 이달까지만 연락 주세요."

원장은 이미 자신은 맘을 정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나에게 근무할 의사를 물었다.

'의중'을 켜켜이 감추는 사람 같진 .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이어서 걸어서도 경기도를 갈 수 있다.

급여와 근무조건은 지금보다 나았다.

(이 지역은 지자체에서 어린이집 조리사에게 생활임금과의 차액을 보조해 주는 제도가 있는 곳이라 타 지역보다 급여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일하는 주방보다 배는 넓고 쾌적했다.

석식조리도 없고, 무엇보다 몸으로 일하는 조리사가 지금처럼 과도하게 정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




나는 달 전부터 내가 원하는 곳의 교집합을 찾아

한 곳을 정하였다.(국공립 어린이집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높은 확률이 있는 시점을 무심히 기다렸다.

그래도 찰나 같은 운이 스친 것 같기는 하다.

가여운 조리사가 될 운명은 일단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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