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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현 May 19. 2024

다시 처음부터

어린이집 조리실 세팅

면접 때 한 번 둘러봤던 주방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춤을 쳐도 될 만큼 주방은 넓었지만 수납과 동선은 말도 안 되게 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펜과 웍도 없이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 두 개가 싱크대밑에서 뚜껑들과 뒤엉켜 있었다.

용도에 맞는 조리도구는 물론 쓸모 있는 소형가전(핸드블렌더, 튀김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식기세척기의 위치였다.

식기세척기는 좌우로 개수대나 조리대가 연결되어 있어야 세척기랙에 세척할 그릇을 담아 밀어넣고 세척이 다 되면 옆으로 밀어서 물기를 빼고 건조기에 정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식기세척기가 싱크대와 떨어진 채 구석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급식담당샘한테 물었더니 전 조리사님도 설거지할 때면 물바다가 되어 좀 힘들어하셨다고만 전했다.

식기를 살균, 건조하는 소독기는 받침대 없이 바닥에 놓여 있어서 아래쪽에 넣거나 꺼내려며 무릎을 구부려야 했다. 

어떻게 주방을 이렇게 공사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년에는 인원이 지금보단 적었다고는 하나

이 비효율적인 주방에서 일을 했다는 게 믿기질 않을 정도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이들 김치는 시판 제품이었고, 소스나 양념들은 딱 봐도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국물멸치와 다시마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 구석에 쇠고기 다시다가 빼꼼 보였다.

물론 경악할 일은 아니다. 어린이집 급식이라 해서 조미료를 쓰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요즘 감칠맛을 내는 많은 제품이 있는데 (노골적인) 다시다를 보니 다소 성의가 없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난 잘 알고 있었다.

굵직한 비용이 드는 식기세척기의 연결 조리대와 소독기 받침대를 구입하는 것은 시간을 두고 원장을 설득해 나아가기로 했다.


3년 4개월 동안 웬만한 메뉴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역 메뉴는 처음인게 더 많았다.

발주처도 바뀌어 가공식품을 다시 꼼꼼히 따져봐야 했다.



나는 일단 조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팬과 웍, 소스와 양념류부터 바꾸었다. 

다시다와 싸구려 소스들을 다 버리고 국물멸치와 다시마, 간장과 쯔유, 매실청과 올리고당, 사과식초와 유정난 마요네즈, 데미그라스소스와 버터 등으로 채워 넣었다.


냉장고는 칸칸이 라벨붙여서 식재료를 한눈에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그건 조리사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매번 냉장고를 점검할 누군가를 위한 배려이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냉장고보다 여기는 소스, 여기는 채소, 여기는 유제품 이렇게 정보를 준다면 점검하는 사람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질 것이다. 


다음은 메인조리사의 나의 습관과 동선에 맞춰 수납을 최적화했다.

왼쪽 아래 서랍형 수납장엔 상온 보관이 가능한 기본양념들을, 오른쪽엔 펜과 웍을 한 번에 잡을 수 있도록 펜정리대를 두었고, 매일 사용하는 일회용품들은 왼쪽 상단에,

매일 사용하는 국냄비 조리볼 소형가전을 인덕션 아래 두었다

 움직임의 마찰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뭔가를 변화 줄 때마다 변화를 원지 않는 이들의 근심 어린 시선이 매번 있었다. 이 불편은 개선되었지만 그 대신 이게 불편해졌다는 식이었다.

"그냥 예전이 낫지 않을까요?"  

그건 변화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자신의 습관은 바꾸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 찾아볼게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인간의 위대한 가설인 "정답은 있을 거야"를 중얼거리며 폭풍검색을 하면 고맙게도 정말 나 같은 사람이, 내가 찾는 물건이 결국엔 있었다.




'얘 들 아 밥 먹 자' 라는 글씨 밑에 여기 어린이집 이름을 수놓은 앞치마를 보자 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리사님, 감동이에요."

내가 또 폭풍검색 끝에 찾아낸 주문제작 앞치마를 보고 잠시라도 감동  할 원장은 없을 것이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그런데 원장이 덧붙인 말이 내 기억 속 누군가를 환했다.

"다음에 구입하실 땐 원에서 사드릴게요."

마음만 받고 비용은 돌려주고 싶다는 원장의 '의중'일 것이다.

마음만 돌려주었던 예전 원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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