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발까마귀 May 14. 2023

애정만세

그녀와의 야간산책, 스쿠터 그리고 얄팍한 자존심

옛날옛적에 아니 그렇게 옛날은 아닌 어느 날 저는 그 당시 썸을 타고 있던 분과 함께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을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시간이 많았고 낯선 타지에 떨어진 외국인들이라 빠른 속도로 친해졌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동네의 한 술집 테라스에서 길가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그녀의 질문에 저는 바로 대답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정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저는 그 길을 가기가 싫었고 또 무언가는 해야 했기에 외국에 나와 어학당을 다니며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거야" 


맘에 있지도 않은 직업이었지만, 그녀에게 어필하기에는 충분한 직업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백수라는 것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꿈이었고, 그리고 뭔가 있어 보이는 신비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의 꿈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공대를 나와 똑똑했던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또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해 여기저기 탐색을 하는 영혼이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서로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가게가 영업종료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여기서 헤어지기는 뭔가 아쉬웠는데 그녀가 운동도 할 겸 야간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자고 했습니다. 걷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녀가 걷자는데 걸어야지요.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 우리는 걸어가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새까맣고 어두운 하늘, 그 무한한 공간. 이제 곧 펼쳐질 우리 인생의 무궁무진한 앞 날을 빈 공간에 그려 넣어보았습니다. 


저는 핸드폰을 꺼내 당시 즐겨 들었던 노래 한곡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습니다. 


"You can drive all night, looking for the answers in the pouring rain

You wanna find peace of mind

Looking for the answer"


"If we could find a reason, a reason to change 

Looking for the answer

If you could find a reason, a reason to stay

 Standing in the pouring rain"


https://www.youtube.com/watch?v=opeETnB8m8w


너무 좋았습니다. 순간순간이 가슴에 느껴졌고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코너를 돌았는데...


우리 눈앞에 교통사고 현장이 펼쳐져있었습니다. 한 남성이 고꾸라진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지인인 듯한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길 한가운데에는 스쿠터가 내팽겨져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제 친구는 그 사람을 부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스쿠터를 길가로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순간 저는 얼어붙었고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스쿠터를 운전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하는데 그녀가 뭐 하냐고 소리쳤고 그제야 저는 그녀에게 


"나 스쿠터 운전 못해" 


라는 말을 초라하게 내뱉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저에게 눈초리를 주었고 대신 다친 사람을 부축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스쿠터를 몰고 안전한 곳에 세웠습니다. 


저는 다친 사람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치진 않은 것을 확인해서 안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방금 그 상황에서 제가 능숙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면, 멋있게 스쿠터를 제가 직접 운전하여 갓길에 세우고 멋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구조요청을 하거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쭈뼛쭈뼛거렸고, 그녀가 그 상황에서 리더가 되어 멋있게 상황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멋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간에서 저는 제가 가진 문제점을 느꼈지만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제가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운전을 할 줄 알았고, 또 대처능력도 저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상황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상황에서 내가 남자고 또 그녀에게 더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실망을 했을 것이란 저의 주관적인 해석과 상상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종료가 되고 난 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저만 혼자서 꽁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년뒤 저는 오토바이 면허를 땄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능숙하게 운전을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자존심 상할 일은 없지만, 아직도 별것도 아닌 것에 자존심을 세우는 일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런 자존심이 없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마음은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오늘도 그때 그 일을 생각해 보면서 다시 한번 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목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