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 현자
어느샌가 나는 나의 관찰자이며 내 세상의 관찰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졸전 주제를 준비하면서도, 꽤나 정적인 학창 생활 속에서도, 휴학을 준비하던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늘 함께였다. ‘관찰하는 나’에 대한 생각은 고등학교 시기를 기점으로 명확히 인지됐고, 그걸 정리한 대학교 1학년 레포트 속에서 실체화되었다. 나는 내가 우울함에 적셔진 사람인가 너무 무던해졌는지 고민하며 어떤 극한의 무감각이 건넨 부정적 산물이라 생각했었다.
대학 졸전을 준비하며 ‘이인증’이라는 키워드가 불쑥 들어온 적이 있었다. 우울함이 극에 달하면 그게 신체적, 정신적 반응으로 드러나는데 그중 내가 나임을 생소하게 느끼는 것, 내 몸이 나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을 ‘이인증’이라고 한다더라. 나는 내가 그것을 앓고 있는지 생각했었다. 어느새 나의 정신적인 고통이 물리적으로 드러났던 것인가 근데 이제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의 내가 우울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나를 ‘우울’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의 실마리를 잡았다.
‘나는 침묵과 고요 속에서 더 깊숙한 나의 의식과 연결되었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조금 사이비적인 문장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게 내 결론이었다.
이상하긴 했다. 나는 너무나 나였다. 끊임없이 생각했고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나는 무얼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지 나의 감정은 무엇인지 나의 주변인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대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표현했다. 관찰자의 느낌은 마냥 우울한 것만 남기진 않았고, 그렇다고 우울만이 관찰자를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나의 고민을 해체한 현재에 대한 감상이 방금 결론으로 정리한 그 문장이다. 이인증처럼 보이는 그것. 나는 나이지만 나는 온전한 나는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나임을 인지한다. 육체는 나를 반영하고, 나의 경험과 시간 역시 나의 신체를 나이 들고 성숙하게 하겠지만 진짜는 끊임없이 소통하던 나 그 자체일 뿐이다. 쓰면서도 어라 나 사이비인가 싶지만 그게 솔직한 내 깨달음이다. 이제 슬슬 내 행동들에 각주를 달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를 만남에 있어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에 큰 필요를 못 느끼는 이유, 심지어 여행지를 고르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었던 이유, 옷을 사고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이유. 그냥 내 본질이 중요하고 그 본질 외의 것들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를 만나는 것의 본질은 그 친구와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의 근황을 듣고 생각을 나누는 것. 어디서 만나고 무언갈 먹는 것은 그 친구와의 시간을 위한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예쁘게 옷을 입고 정성스레 화장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평균값만 유지하는 정도가 부차적임에 충분한 정도이다. 보이는 직업이 아닌 이상, 평범한 일상에서 꾸미는 그 자체가 본질이기는 쉽지 않다. 그냥 그런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한 것들은 하나의 주된 관심사나 취미가 될 수는 있다. 그 속에 본질을 담고자 한다면 해당 활동에 무게를 더 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나의 본질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늘 고민이었다. 나의 삶은 왜 늘 고요한지, 왜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지, 왜 삶의 방향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는지. 외부 활동은 정말 필요한 것 이외에는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진 않았다.
교환이었다. 누군가는 대학 시절 이것저것 경험하며 다양한 감각 경험들과 지식을 쌓았겠고, 나는 최소한으로 해야 할 것만 하며, 평온 또는 고요 또는 정적의 두려움 속에서 이러한 것을 찾은 거다. 늘 나는 왜 이리 삶의 경험 뒤에 있나, 나는 나 자신을 부족한 경험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이, 또는 활발히 활동하는 또래와 달리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더 구석으로 파고들어 결국 히키코모리가 내 인생의 종착지는 아닐지 늘 걱정하곤 했다. 근데 이제야 정리된 언어로 내린 중간 결론은 나는 보다 관찰자가 되었다. 나와 아주 밀접하게 맞닿는 방향으로. 또 내가 추구하는 본질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사람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도 인간인데 나에게 죽음은 무엇이고 죽음 이전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산다는 건 무엇이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이며 허무란 무엇인지. 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인간으로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낼 건지.왠지 모르게 인생의 유한함을 아주 깨달아버린 것 같은데 공허 속에 머무를 건지 또 다른 가치를 찾을 것인지.
음
나는 작은 꼬맹이 현자가 되었다. 나는, 지극히 인간이기에 유한한 사람임을 인지하고, 어리숙한 사람임을 인지하고, 삶이 주는 경험에 아주 제대로 퐁당 빠지기로 했다. 매 순간에 내가 담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즐겁기 위해 준비한 순간이라면 제대로 즐거울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인간으로 사는 거 해보고 싶은 것도 해보기로 했고 노력도 한다. 허무와 공허는 때때로 찾아오지만 뭐랄까 개발자의 입장이 잠깐 되어본 사람이 즐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할까. 물론 함정을 다 외우진 못해 고난도 오겠지만 인생이 귀하지만 그렇다고 손아귀에 힘을 꽉 쥐고 붙든다고 평생 붙들어지는 게 아님을 인식하기에 그냥 뭐가 오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주변인들이 더 귀해진 건가. 나는 나의 죽음이 언젠가 올 거라 믿기에 내 가족이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다 생각하고 가족이 모이는 모든 순간을 삶의 마지막에 남기는 카메라처럼 관찰하고 저장한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에도 내가 감정이 상하더라도 금세 생각을 바꿔 먹고 상황을 전환한다. 즐거운 순간에는 즐거운 내 감정을 곱씹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이 며칠인지 숫자상으로 이날을 인지하고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을 상세히 쪼개어 관찰하고 우리가 서 있는 이 배경 공간을 기억에 박제한다. 감정에 휩싸일 때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 하고, 그게 나의 잘못이라면 얼른 사과한다. 만약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더라도 굳이 싸움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길게 끌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고 이해가 되면 너그러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빠르게 치고 박고 싸우고 얼른 풀고 끝낸다. 그냥 그게 지금 나의 경험을 온전히 하기에 좋은 방향이라서. 굳이 이롭지 않은 감정들도 지금 이 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 양보할 수 있는 건 양보한다. 그렇지만 정말 내가 가져야 하는건 요구한다. 이 선을 유지한다. 내가 손해 보는 듯 아닌 듯싶은 이 선, 경험을 내가 원하는 감도에 맞출 수 있는 최적의 손해라고 해야 하나.
원래는 고요를 부정적인 시간의 산물로 봤는데 이 정도의 교환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