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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광환 Nov 20. 2024

[단편소설] 망각센터

그는 어떻게든 이별의 고통에서 해방되어야만 했다.


1

이 이야기의 발단은 민수가 혜영이에게 절교를 당한 데서 비롯 되었다.

며칠을 술독에 빠져 살던 민수는 결국 친구 영철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민수와 혜영이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끔찍한 사랑을 나누었는지, 영철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영철이는 오랜만에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들떠 있는 자기 형에게 민수 일을 말하면서 경고했다.

“사랑을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형도 조심해.”

매사에 모범적이지만 성격이 소심한 형은 동생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점쟁이 사이트를 뒤져본 영철이 형은 고객들로부터 특별한 지지를 받는 점쟁이를 찾아냈다.

영철이 형이 점쟁이 집을 찾았을 때 헬스트레이너가 딱 어울릴 만큼 젊고 남성적인 점쟁이가 맞아주었다. 한참 동안 점괘를 따져보던 점쟁이는 앞날이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말로 영철이 형을 안심시켰다. 영철이 형이 복채를 계산하고 문을 나서려다가 점쟁이에게 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동생 친구 녀석 하나가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괴로워합니다. 그런 친구들의 고통을 해소할 무슨 방도 같은 것도 가르쳐주십니까?”

조용히 듣고 난 점쟁이가 말했다.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조언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심리치료사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영철이 형이 뒤돌아서려는데 점쟁이가 그를 불러 세웠다.

“당사자가 원한다면 그런 종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을 소개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더니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이분은 남녀 간의 불행한 이별에서 오는 극심한 고통을 치료해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분입니다. 꽤 유명하죠. 당사자가 만약 이분을 찾아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영철이 형은 그 명함을 동생에게 주었고, 영철이는 다시 민수에게 전달했다.

“용한 점쟁이가 추천하는 사람이니 꽤 능력이 있나 봐. 이 사람을 찾아가서 네 고통을 좀 해소해봐. 널 보고 있는 나까지도 괴로워죽겠어.”

영철이의 진득한 우정에 술 취한 민수는 꺼이꺼이 울기까지 했다. 이 엄청난 이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민수는 다음 날 명함주인을 찾아갔다.     



2

근방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지어진 빌딩의 맨 꼭대기 층이 명함에 적힌 주소였다. 민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정면의 접수처로 보이는 위쪽으로 ‘망각센터’라는 크고 예술적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망각센터는 이 엄청나게 큰 빌딩의 꼭대기 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접수처로 다가가면서 보니 통유리 벽으로 막아놓은 여러 방들에 사람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흰 티셔츠를 똑같이 입고 있었는데, 등 쪽에 저마다 모양이 다른 붉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란 민수가 가만 보니 그들은 명상을 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 수가 많았어도 내부는 고요했다.

민수가 접수처로 가자 여직원이 상냥한 웃음으로 말했다.

“예약하셨나요?”

당황한 민수가 할 말을 잃고 있으려니 여직원이 다시 말했다.

“아, 처음 오셨군요. 그렇다면 센터장님과 먼저 상담을 하셔야 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센터장님 방으로 안내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여자가 실내 수화기를 들고 사람을 부를 때, 민수는 긴 복도가 이어진 건물 안쪽을 쳐다봤다. 그쪽으로 미로 같은 복도가 연결되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니 허리띠에 달린 가죽집에 웬 곤봉 같은 걸 차고 있는 건장한 남자가 다가왔다.

“저를 따라오시죠.”

민수가 얼떨떨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자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끄덕여보였다. 남자를 따라가라는 시늉이었다.

남자는 복도를 돌아 맨 끝의 건물 창이 있는 곳으로 민수를 데려갔다. 그가 선 앞에 ‘센터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이 있었다. 남자는 두 번 노크를 하더니 안쪽의 반응을 기다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민수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넓은 방 안의 통유리 창 앞으로 작은 남자가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탈색했는지 노란색이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얼굴도 서양인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자신의 앞쪽을 가리켰다. 민수가 어정쩡하게 그의 앞에 앉으니 놀랍게도 민수를 안내해온 건장한 남자도 옆에 앉았다.

“저는 세르게이 스테파노프라는 사람입니다. 원래 러시아 사람이지만 한국으로 귀화했죠.”

그의 키는 150cm가 채 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몸집도 왜소해서 백인 피그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주름이 전혀 없는 얼굴에 왼쪽 귀에 귀걸이를 매달고 있는 그가 젊은 사람인지 나이 먹은 사람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가 바리톤에 가깝도록 굵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젊은 사람 목소리가 아닌 것이다.

“우선, 당신이 마음속 고통에 못 이겨 우리를 찾아온 건 정말 현명한 결단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거기에 따른 후유증 또한 얼마나 심대한지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먹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설사 자신의 병에 대해 잘 안다 해도 당신 같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우리 망각센터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큰 문제죠. 그런 사람들에겐 참으로 애석한 일이긴 합니다만, 거기에 비해 당신은 운이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투는 몹시도 다정다감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벌써 마음속 고통이 반은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민수는 의문이 들었다.

“제가 마음속에 고통을 안고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

세르게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 고통이 없다면 우리를 찾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업계에서 제법 인정받는 광고회사 PD인 당신은 스물일곱 살입니다. 세 살 아래인 광고모델 이혜영과 3년을 사귀다가 얼마 전 헤어졌지요. 그것도 이혜영의 일방적인 결별 통고로 말입니다.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당신 마음속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는 아픔보다 여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수치심의 고통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당신을 위한 마음이 거의 헌신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여자의 배신 뒤엔 광고업계의 기린아인 박준영이라는 PD가 있습니다. 박준영이 누굽니까. 그 사람은 당신이 광고업계의 우상으로 삼던 선배가 아닙니까. 이러니 당신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민수는 깜짝 놀랐다. 세르게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민수가 모르는 일도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혜영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민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른 남자가 박준영 선배라는 건 모르던 일이었다. 민수는 세르게이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자세하게 알죠? 내가 여길 찾아오겠다고 결심한 건 불과 어제 저녁이었는데...”

뭔가 잘 못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보다 자신에 대해 더 잘 아는 이 사람들의 정체는 뭔가. 민수는 세르게이라는 이 사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잘 못 찾아온 게 아닌가, 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생각에 젖어 있는 민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세르게이가 말했다.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러 온 사람이 치료자에 대한 불순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잘 못 된 일입니다. 우리는 고객의 치료에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죠. 당신 옆에 앉은 이 사람은 동양인 얼굴이긴 하지만, 이고르라고 하는 나와 같은 러시아인으로서, 시베리아 부족인 축치족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 센터에서 고객의 불순한 생각을 정리해주는 직분을 담당하고 있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그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릴 게 있습니다.”

그러더니 세르게이가 러시아 말로 그에게 말했다.

“이고르! 우다이율 드바! (이고르, 두 대만 쳐라!)”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축치족이라는 남자가 팔을 앞으로 올려 접더니 팔꿈치로 민수의 명치를 가격했다. 순식간이었다. 억! 하면서 앞으로 쓰러지는 민수의 턱을 향해 이번엔 주먹이 날아왔다. 앞으로 쓰러지던 민수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두 대를 얻어맞은 민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잔뜩 겁에 질린 민수에게 세르게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당신의 병은 그리 깊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달이면 당신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후유증은 무시할 수 없어서, 그 후로 약 일 년은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에게 한 달분의 치료비만 받겠습니다. 후유증은 당신의 상태를 봐 가면서 치료를 하게 될 겁니다. 치료에 동의하시겠죠?”

“치료는 어떤 식으로...”

민수가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자 세르게이가 상체를 숙여 민수의 볼을 쓰다듬다가 톡톡 두드렸다.

“치료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약 시간에 센터에 오셔서 하루 한 시간 씩 명상을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자꾸 찾습니다만, 그것은 망망대해에 난파당한 뱃사람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죠. 술이 깨면 더욱 큰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시게 되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 중 어느 한 곳이 부러지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 부모님이 늦둥이로 둔 어린 여동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걸로 알고 있죠. 만약, 그래도 이후에 또 술을 마시게 된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의 신체 중 어느 곳이 잘려 나갈 수밖에요. 물론 치료하는 동안 센터에 나오시는 규칙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라도 빠지면 거기에 따른 벌칙이 준비되어있습니다만, 그건 그때 가서 아시게 될 겁니다.”

“어, 어째서 내 동생까지..... 그,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데....”

기가 막힌 민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치료의 일환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세르게이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겁에 질린 민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민수는 이곳을 소개해준 친구 영철이가 저주스러웠다.

‘이 개자식이 자기 친구를 이런...’

그러나 민수는 얼른 생각을 멈췄다. 옆에서 이고르가 노려보고 있었다. 민수는 자기 생각을 훤히 읽고 있는 이 사람들이 두려웠다. 민수를 쳐다보고 있는 세르게이가 빙그레 웃었다. 민수는 생각을 억누르려 기를 쓰고 버텼다.

“이제 내 설명을 이해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세르게이가 이고르에게 말했다.

“손님을 명상실로 안내해드려라.”

그는 민수를 데리고 남자들만 있는 명상실로 들어갔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한쪽을 향해 앉아 명상하고 있었다. 그 방 옆으로 더 많은 인원이 들어있는 여자 명상실이 보였다. 이고르는 탈의실 앞에서 민수에게 흰 티셔츠를 내밀었다. 그 티셔츠는 다른 사람들이 입은 것과는 다르게 붉은 무늬가 없는 깨끗한 흰색이었다. 민수가 티셔츠를 갈아입고 나오니 그는 명상실 맨 뒤쪽 자리를 가리켰다. 민수는 그 자리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고르를 쳐다봤다. 그는 허리에서 곤봉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곤봉으로 알고 있던 그것은 꺼내고 보니 가죽집 안에서 긴 줄 같은 것이 딸려 나왔다. 작은 철편이 붙어있는 채찍이었다. 민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는 걸 보더니 이고르가 미세한 웃음을 지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혹시 졸거나, 또는 마음 가운데 잡생각이 들어오면 이 채찍이 당신의 번잡한 마음을 정리해 줄 겁니다.”

앞 사람들 등에 그려진 붉은 무늬들이 핏자국이라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요동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 속 묵직한 망치가 쾅쾅 내리쳤다.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우려 해도 겁에 질린 머릿속이 온통 핏빛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생각을 몰아내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몸이 어찌나 떨리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무릎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때 첫 번째 채찍이 등으로 날아들었다. 눈 감은 어둠 속이 별빛으로 환하게 빛날 정도로 정신이 아득했다. 잠시 후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민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이고르가 속삭이듯 말했다.

“명상하는 옆 사람에게 방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조용하십시오.”

두 번째 채찍이 날아왔다. 민수는 고통의 신음이 이빨 사이로 새 나오지 않도록 이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그래도 등 쪽의 생가죽 벗겨지는 듯한 고통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3

혼자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온 민수는 오늘 일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당장 영철이에게 전화해서 저주를 퍼붓고 싶은 마음 가득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지만 등 쪽의 고통으로 이미 식욕은 달아나고 없었다. 이 상황을 잊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사랑스러운 미소로 가슴을 녹여주던 혜영이가 마녀의 얼굴로 떠올랐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건 오로지 술밖에 없었다. 민수는 냉장고로 달려가 소주병을 꺼냈다. 뚜껑을 딴 뒤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세르게이 목소리가 울려왔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 중 어느 한 곳이 부러지게 됩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민수는 소주병을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오빠, 나 친구들이랑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중이야.”

앙증맞은 동생 목소리가 전화에서 흘러나왔다.

“아, 그래.....”

“근데 오빠 왜 전화했어? 민아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럼. 우리 민아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에이 바보 오빠. 낼모레 토요일 날 집에 와서 보면 되지. 그때까지 못 참아서?”

“그래, 못 참아서.”

동생이 까르르 웃었다. 전화기에서 동생 친구들이 조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저씨 있잖아. 저 양복 입은 아저씨. 아까부터 우리만 쳐다보고 있어. 너도 봤지.”

“나쁜 아저씨 같다, 그치.”

민수는 귀에 들려온 그 소리에 전율이 왔다. 민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아야, 얼른 집에 들어가. 어서! 거기 나쁜 아저씨 있지? 그 아저씨 진짜 나쁜 아저씨야!”

그러자 동생이 친구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집에 가자. 저 아저씨 진짜 나쁜 아저씨래.”

“누가 그래?”

“우리 오빠가.”

전화를 끊고 민수는 냉장고를 열어 소주와 맥주, 그리고 얼마 전 생일 때 고급와인이라면서 영철이가 선물로 가져온 샤또 오브리옹까지 모두 꺼내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4

민수가 망각센터에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영철이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너 죽은 줄 알았잖아. 왜 전화도 안 받고 그래.”

그동안의 일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엄청난 일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민수는 그저 바빴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근데, 너 어디 아파?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얼굴이 어때서?”

“얼굴이 쪽 빠졌잖아. 넌 거울도 안 보고 사니?”

“운동을 좀 과격하게 했더니 그런가 봐. 배가 나오는 거 같아서 말이야.”

“야, 너 배 나온 거 어제오늘 일이냐? 갑자기 왜 그래? 너, 혜영이 일로 쇼크 먹은 거 때문에 그러지? 근데, 거기 치료센터라는 데는 별 효과 없는 거야?”

“아냐, 지금도 다녀. 이제 혜영이 일은 다 잊었어.”

“정말이야?”

“그럼.”

영철이가 민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다행이네. 그나저나 밥이나 사줘라. 배고파 죽겠다.”

“이제 오후 세 시밖에 안 됐는데, 점심 안 먹었어?”

“너한테 얻어먹으려고 굶었어.”

기가 막힐 일이 요즘은 왜 이리 많은지 생각했지만, 민수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골목길을 걸어 둘은 자주 가던 갈빗집으로 들어갔다. 갈비를 장뇌삼으로 잰다며 으뜸가는 건강식품임을 자랑하는 집이었다.

대낮인데도 갈비가 익자마자 영철이는 소주부터 입에 털어 넣었다.

“아, 시원하네. 넌 안 마셔?”

“안 마셔.”

영철이가 자기 빈 잔에 소주를 부으면서 민수를 쳐다봤다. 웃음이 배어 있는 눈이었다.

“왜?”

“그냥, 안 마셔.”

“끊었어?”

“일 년 동안만 안 마실 거야.”

“그다음엔 마실 거고?”

“응.”

“그럼 아예 끊은 건 아니네?”

“술을 왜 끊냐?”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아냐.”

“근데 왜 일 년만 안 마셔?”

“네가 알려준 그 망각센터에서 그러래.”

“치료의 일종이야?”

“그런 거지.”

“근데 꼭 그래야 돼? 조금만 마셔도 안 돼?”

“안 돼.”

민수는 영철이 머리를 고기 굽는 판에 처박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하긴 영철이는 죄가 없었다. 혜영이 때문에 괴로워하던 자신을 어떻게든 구제해주려던 친구 아닌가. 그러나 영철이의 이성은 혼자 술 한 병을 비울 때까지만 말짱했다. 두 번째 병을 따고 나서 영철이는 민수에게 함께 마시자고 졸라댔다.

“야! 이 맛있는 갈비 앞에서 예의를 좀 차리라고. 어떻게 나 혼자 마시냐? 이 갈비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정말 안 마실 거야. 너나 많이 마셔. 술값 걱정하지 말고.”

“술값 내가 낼게. 그러니 제발 좀 같이 마시자.”

“싫어.”

“그럼 딱 한 잔만 마셔라. 내가 한잔 마실 때마다 넌 입술이라도 적셔. 너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나 정말 너 안 본다?”

민수도 영철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술 안 마시는 친구 앞에서 혼자 마시는 술맛처럼 맛없는 음식이 없는 법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 마시는 게 낫다. 민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그래, 딱 한 잔만 마시는 거야. 어떨라고.

민수는 영철이가 따라 준 소주 한 잔을 아껴가면서 마셨다. 영철이가 세 병을 비울 때까지. 다행히도 영철이는 그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5

영철이를 보내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망각센터입니다.”

세르게이 목소리가 차가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친절한 표정을 잃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약간 거드름이 끼어있는 말투였다.

“아, 네. 어쩐 일이시죠?”

“동생이 여기 있습니다. 잠깐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민수는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내 동생이, 거, 거긴 왜 갔다는 말입니까?”

“경고했잖습니까. 술을 마시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안 돼!”

민수는 저쪽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민수는 자기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달려갈 시간이 없었다. 도로로 뛰어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요금이 만 원이 채 되지 않을 거리였지만, 민수는 오만원짜리 지폐를 택시 기사에게 내밀며 외쳤다.

“빨리 좀 달려주세요! 제발 좀 빨리요!”

깜짝 놀란 택시 기사는 있는 힘껏 가속 폐달을 밟아댔다.

동생이 오늘 자연사박물관으로 공룡을 보러 간다며 자랑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 동생은 어느 박물관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 박물관 이름은 동생도 모를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데려가는 거니까. 수도권엔 공룡화석을 전시한 자연사박물관이 여러 곳이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동생을 데려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망각센터로 뛰어 들어온 민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접수처로 뛰어 들어가 여자를 찾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는 민수 눈에 복도 끝 저쪽에서 세르게이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이고르도 따라왔다. 민수는 그쪽으로 뛰어가 세르게이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당신들, 당신들 이러면 안 됩니다. 내 동생을 내놓으세요. 내 동생 어디 있어요!”

세르게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여긴 아시다시피 많은 분이 명상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두 사람은 민수를 데리고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유리 칸막이로 사방을 막은 작은 방이 있었다. 동생은 그 안에 있었다. 민수가 유리 벽으로 뛰어가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동생은 못 보던 토끼 인형을 안고는 치킨을 먹으면서 웃고 있었다. 접수처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그 앞에서 티슈를 든 채 동생을 마주 보고 웃는 모습도 보였다. 민수가 유리 벽을 두드리며 동생을 불렀다.

“민아야!”

하지만 동생은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가 티슈로 입을 닦아주자 그대로 입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세르게이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말했다.

“저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두드린다 해도 소리 또한 들리지 않죠. 어쨌든 오늘은 다시 한번 경고를 드리는 겁니다. 다음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저 사랑스러운 동생의 안전을 바라는 오빠라면 내 말을 경청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를 어떻게 데려왔죠? 어떻게 저 아이가 이 낯선 곳을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쟤는 겁이 많은 아인데, 당신들, 저 아이한테 어떻게 한 거죠?”

세르게이가 전화를 꺼내 녹음한 내용을 틀었다. 거기서 민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는 오빠인 줄 알고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공룡 이야기를 신이 나서 조잘댔다. 민아 이야기가 끝난 후에 다시 민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민아, 오늘 집에 오빠랑 같이 가자. 오빠 친구가 박물관으로 널 데리러 갈 거야. 그 사람하고 오빠 사무실로 와. 알겠지?’

‘오빠가 그냥 여기로 오면 안 돼?’

‘오빠가 바빠서 그래. 너 오빠 사무실로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

‘치킨 사줄 거야?’

‘치킨 먹고 싶니? 그래 알았어. 치킨 사줄게.’

‘알았어, 오빠. 이따가 봐.’

‘응, 그래.’

놀랄 일이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민수 특유의 말투까지 똑같았다. 동생도 그 목소리에 속은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동생에게 끝까지 박물관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동생을 데려왔다. 민수가 보기에 그들은 어떤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 낼 인간들로 보였다. 몸서리가 쳐졌지만 그래도 동생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6

망각센터의 한 달이 무사히 지나갔다. 하지만 민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세르게이는 분명 후유증 기간이 일 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일 년은 속이 졸아붙던 지난 한 달과는 다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철이가 전화를 했다. 박준영 선배가 모처럼 술자리 초대를 했다는 것이었다. 민수는 벌써부터 술이 싫어졌지만, 광고업계 지배자인 박준영 선배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박준영 선배는 신사답게 술을 마다하고 사이다를 마시는 민수를 이해했다. 그는 술이 얼근히 오르자 여자 친구 자랑을 했다.

“아마, 너희들도 알 거야. 혜영이라고, 지난번에 민수가 광고 하나 같이 찍은 적 있었지?”

대번에 영철이 안색이 변하면서 민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수는 쾌활하게 말했다.

“아, 그 친구요? 이야! 선배, 알고 보니 여자 보는 눈이 확실하네. 내가 그렇게 찍어도 안 넘어가더니 결국 선배를 만나려고 그랬나 보네요.”

“아, 그랬어? 걔가 눈이 좀 높긴 하더라고.”

박준영은 내친김에 2차를 클럽으로 쏘겠다고 나섰다. 민수 눈치를 보던 영철이는 얼른 박준영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민수가 말렸다.

“영철아, 모처럼 선배가 쏘겠다는데, 너 왜 그래?”

세 사람이 클럽 앞에 도착해보니 뜻밖에도 혜영이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영철이가 기절할 듯한 눈으로 돌아서 얼른 민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이미 민수는 앞으로 나가 혜영이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 혜영씨도 나오셨네? 오랜만에 보니 혜영씨 더 예뻐지셨네요. 선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할 만하네.”

민수의 너스레에 영철이 뿐만 아니라 혜영이까지도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박준영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네 사람이 그렇게 클럽에 들어간 후, 영철이 걱정과는 다르게 민수는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너무도 천진스럽게 놀았다. 한참을 정신없이 춤추던 민수가 화장실엘 갔다가 나오는데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혜영이었다. 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민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아냐,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내가 더 미안하잖아. 박준영 선배,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 나 같은 놈은 댈 것도 아니지. 아주 잘 됐어.”     



7

그날 이후 영철은 민수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클럽에서 보인 민수 행동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었다. 술까지 자제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줄 알았던 민수였다. 그동안 좀 풀이 없어 보이긴 했어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혜영이를 다시 만나니 민수 머릿속에 걷잡을 수 없는 화학반응이 폭발한 것 같았다. 영철의 충격은 컸다. 영철은 형에게 용하다는 점쟁이 말을 들은 바 있었다. 아무래도 민수를 구슬려서 점쟁이에게 데려가 또 다른 여자와의 인연은 언제쯤 생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걸 알게 된다면 민수 마음도 안정되리라. 뜻밖에도 민수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영철이 형이 가르쳐 준 점쟁이에게로 갔다.

“이번에 만날 여자는 결혼까지 하겠군요. 그런데 이 여자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여자입니다. 도시 여자가 아니네요.”

영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 친구, 여자 보는 눈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아, 제 말은, 인물을 굉장히 따지는 친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덩치 우람한 점쟁이가 눈을 치뜨고 말했다.

“농사짓는 여자는 미인이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어차피 제 짝은 제 눈에 들어있는 법입니다.”

“하긴 그렇군요.”

영철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점쟁이 말을 수긍했다. 그러더니 점쟁이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 형한테 망각센터를 소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거길 가야만 했던 당사자가 이 친구거든요. 그래서 다시 만날 여자에 대해 점까지 보러 온 겁니다.”

그러자 점쟁이가 민수를 돌아봤다. 그 눈에서 약간의 섬광이 나오는 듯 하더니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가 민수에게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어땠습니까. 그 망각센터 효과가 있었습니까?”

민수가 점쟁이에게 말했다.

“효과가 아주 컸습니다. 대번에 마음 정리가 됐지요.”

“그러셨을 겁니다.”

그가 민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민수는 악수하면서, 그의 새끼손가락이 두 마디쯤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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