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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스테라맛 마카롱 Oct 09. 2022

일인칭 단수

 돌베개에

  가로로 끝없이 펼쳐진 여느 평범한 오후의 지평선처럼 단조롭던 나의 일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변화를(비록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지만) 마주하고 있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 글로 정확하게 표현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정도까지는 적을 수 있겠다. 


'알을 깨고 나오더라도 우리는 결국 알 바깥에 존재하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어..'


  행복하고 싶었지만, 행복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현실을 넘지 못한 적이 많았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약간만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태어나기 위해 알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깨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면한 문제 앞에서 쉽게 단념하게 됐고, 조용히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던 '단념하는 습관'은 어느샌가 머릿속 일부분을 차지했다. 습관들은 염세주의라는 편안한 방법을 내게 소개했고, 나는 그 편안함에 속아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떠한 의미 없이 그냥 흘려보냈다.


'기억도 그리고 추억도 정보의 집합에 불과할 뿐이야.. 없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듯 그녀의 노래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그날 밤 물고 있던 수건에 남은 잇자국의 기억과 이어져 있어서,
그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돌베개에」中


  그랬던 내 삶에서 미세한 변화를 인지하게 된 건, 몇 달 전부터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과(그렇다고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한 주에 딱 한 번, 운이 좋다면 많아야 두 번밖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이후부터이다. 이유를 알고 싶었고, 답을 찾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방법과 시간의 들였다. 고민의 시간 속에서 한 친구의 추천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읽게 되었고, 그 단편소설집을 통해 나는 나름대로의 정답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일인칭 단수>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 <돌베개에>에서 '나'는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연상으로 추정된다)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다. 일주일 후 여자는 약속대로 '나'에게 직접 쓴 가집을 보내고, '나'는 그날 이후로 만나지 못한 그녀를 가집을 읽으며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본인 외에 그녀가 지은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 가집 안에 담긴 편의 단카를 암송할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그녀가 지은 노래와 단카를 '나'만 기억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나'는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그 노래와 단카를 기억할 수 있었다. 만약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만약 그들의 관계 안에 잇자국이 없었다면, 가집은 물론이고 '그녀'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나'의 삶 속에 그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의 세계 그녀도, 노래도, 단카도 존재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무진히 아픈 세계였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나'에게 그녀가 찾아왔던 것처럼, 나에게도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기존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됐다. 누군가의 한없는 은혜인지 아니면 그냥 인연이라는 동력에 불과한 것인지는 앞으로 계속 알아가야 할 문제겠지만, 지금 나의 세계에는 자격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많았으면 좋겠다), 미없고 답답한 내게도 <일인칭 단수>를 빌려주는 좋은 친구가 있고, 내 고민을 듣고 위로해주는 친구 존재한다. 내 삶에서, 나의 소우주라는 세계에서 변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지금까지의 변화를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처음에 그렇게 쓰고자 했던 것은 냉소주의에 밀려난 행복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조금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사유하다 보니 고작 그런 이유로 변화를 '행복'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행복'이라는 소중한 언어를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요란한 소리에 머무르는 정도로 다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웃음과 기도를 에너지로 나의 작은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확인할 수 있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는 원인만으로 나라는 세계의 외연이 확장되고, 소멸하는 역사로 가득했던 좁고 어둡던 소우주에 빛이 들어오게 됐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찾은 정답에 대한 단서는 부끄럽지만 아직 이 정도다. 머리가 타인만큼 탁월하지 못한 탓에 이전까지 삶과 세계에 대해 스스로 내린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삶이 변하고 있는 이유, 즉 내가 지금 행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다가간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대신 이전처럼 거대담론과 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에 직면한 것들, 앞에 놓인 질문들에 대한 작은 답을 찾는 것부터 단계를 밟아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하루키의 소설을 읽게 된 계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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