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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즐거운 몰입으로, 독서의 역사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세종서적

사람은 살면서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이가 쌓인 만큼 그동안 많은 선택을 해 왔지만, 그중에서 언제나 잘했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서라는 직업을 택한 것이다. 추상적인 ‘책’에 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했고, 전공에 대한 애착은 별로 없었지만, 졸업 후 서울 모 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게 되면서 ‘사서’라는 직업이 천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도서관은 폐가제(회원이 보고 싶은 책을 종이에 적어 사서에게 신청하면 사서가 서고로 들어가 책을 찾아 전달해 줌)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서고는 사서들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신청한 책을 찾아 고요한 서고에 들어설 때면, 신비로운 미로를 만난 듯 설렜다. 그때의 설렘이 『독서의 역사』를 펼치면서 다시 찾아왔다.   

    

이 책을 쓴 알베르토 망구엘은 194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외교관인 아버지 직업 때문에 항상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감을 저자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해소했다. 16살이 되던 해 작가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환상 문학의 대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나게 되고, 시력을 잃은 작가에게 2년 동안 책을 읽어주게 된다. 이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만남은 저자가 세계적인 독서가로 성장하는데 많은 지적 영감을 주었다.      


이 책에는 진흙 조각(B.C. 4,000년경)에 기호를 새기면서 시작된 인류 문자가 어떻게 지금의 책의 형태로 발전해 왔는지, 낭독에서 묵독까지, 시대별 책 읽는 방법, 이름만으로도 위대한 독서가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읽으면서 독서가이자 작가로 무한의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자의 경이로운 지적 세계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 때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나에게로 오기까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목숨과도 쉽게 바꿀 수 있었던 책에 대한 열정에 감동했다.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 두 발을 편안하게 꼰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 손은 옆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를 받친 자세로 무릎 위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읽고 있다.”(p.9)

책의 첫 문장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이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B.C. 331년)를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의 개인 교사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움과 읽기’를 배우면서 스승처럼 지독한 독서광으로 자라났다.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기록하기 위해 책을 수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스승의 영향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도서관 가운데 최대 규모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도서관 서가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책이 꽂히면서, 시인이자 학자였던 칼리마코스(B.C. 3세기 초)가 ‘사서’가 되어 장서들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구 상의 모든 책을 모으고자 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대한 꿈은 안타깝게도 3세기경 로마의 침략으로 소실되면서 전설로만 남게 된다. 


이 책에는 기괴해 보이는, 움직이는 ‘낙타 도서관’도 나온다. 페르시아의 수상이었던 압둘 카셈 이스마엘(10세기)은 여행을 할 때도 책과 떨어지기 싫어 11만 7천 권에 달하는 책들을 4백 마리의 낙타에게 싣고, 알파벳 순서로 걷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무거운 책들을 등에 지고 뜨거운 사막을 터벅터벅, 묵묵히 걷던 낙타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무거운 책들을 내려놓고 순한 눈으로 곤한 잠에 빠져든다. 고생했어, 낙타야.     


두툼한 부피를 자랑하는 『독서의 역사』는 처음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작가의 유려한 안내로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높은 산을 오른 듯 머리가 상쾌해지고, 심장은 뜨겁게 두근거린다. 작가는 이 책으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의 굽이굽이, 나를 일으켜 세운 책 목록들도 함께 떠 올라 즐거운 몰입으로 이끌었다. 어느덧 우리 도서관의 ‘독서 역사’도 4월 1일이면 20년이 된다.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동안 도서관을 거쳐 간, 현재 이용하고 있는 수많은 ‘고*울의 독서가’를 찾아 ‘도서관의 역사’를 기록해 보려고 한다. 기록함으로써 스스로 역사가 되는 것이다.     


* 이 책이 '대학원' 신청과목의 부교재로 있어서 다행이다. 미리 한 권은 읽어놔서...^^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동안 잊고 있었던 '브런치' 공간을 떠올렸고, 두 번째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고마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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