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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누 Oct 17. 2022

시선을 받는건 늘 어려웠지

흔히들 성격은 바뀔 수 있다고 한다.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은근한 관심은 좋아하지만 이목이 집중당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혹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이어나갈 때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순간을 힘들어해요. 성인이 되고 대학교 때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에 친한 지인과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공대원들은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아서 보스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평소엔 식은 죽 먹기로 잡았던 보스가 잘 잡히지 않았다. 7명의 공대원들은 나의 플레이를 관전하는 상황. 결국 보스와의 일기토에서 패배해 죽었고 친한 공대원이 보이스로 "이거 봐 사람들이 지켜보니까 못한다!!"라며 놀렸던 일이 있다. 그 지인도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 그 심정을 알기 때문에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직접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게임에서 마저 남들이 내 플레이를 보고 있다고 하니 손에 땀이 맺혔다. 


대학교 신입생 때엔 교양수업에서 아무도 조장을 하지 않아서 내가 마지못해 조장을 했다가 발표까지 떠맡게 됐던 적이 있다. 거의 80명이 넘어가는 큰 강의실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고작 5분 좀 넘어가는 발표 시간이 5시간 같이 느껴졌었다. 마이크를 쥔 손은 계속 떨렸으며 목소리도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은 빨개지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럴 거면 대본은 왜 들고 간 것인지. 발표를 끝내고 난 후에 떨떠름했던 조원들의 표정까지 무대공포증 종합 선물세트였다. 전날에 5 분짜리 발표를 위해 몇 시간 정도 연습을 해갔음에도 이랬으니 충격은 사실 꽤 컸다. 게다가 내 발표 앞사람은 같은 과 동기였는데 평소에도 유흥에 일가견이 있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사람들 앞에 안 서는 일을 하기엔 아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레크리에이션 강사 뺨치는 언변을 자랑해 교실의 분위기를 업시켰다. 이건 트루먼쇼가 아닐까. 나는 청문회에 출석한 정치인 느낌으로 무대를 올라가야 했고 결과는 검증 실패 도장이 꽝 찍힌 느낌을 받으며 내려왔다.


그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발표가 있는 강의는 최대한 기피했다. 방대한 양의 개인 과제가 있을지라도 발표 준비보단 수십 배는 나았기 때문이다. 군대를 갔다 온 후에도 딱히 무대공포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복학과 코로나 대확산은 겹쳤고 많은 학우들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수업방식에 불만을 표출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으나 공교롭게도 코로나로 인한 수업 방식에 더 잘 적응했다. 온라인 수업의 장점들이 내 성격에는 잘 맞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리포트나 글쓰기, 감상문류의 과제가 상당히 많아졌고 글 쓰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나는 거의 즐기다시피 과제를 했다. 발표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발표도 본인이 녹화한 것을 올려서 학우들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오히려 재밌게 자료를 만들었다. 화상강의의 장점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었고 카메라만 응시하고 말할 수 있었기에 약간 긴장은 됐지만 훨씬 편했다. 

마이크가 켜진 순간에만 온전히 집중해서 말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메모장에 할 말을 정리하고 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대면 강의 덕분에 학점은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졸업할 때에도 나쁘지 않은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무대공포증은 여전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많이 개선되진 않았다고 말하련다. 여전히 발표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일이 있으면 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대본을 쓰고 발표 장소가 강의실이라면 비슷한 곳에서 혼자 연습을 한다. 학회장을 맡았을 때도 고작 10명 남짓한 학회원들 앞에서 발제를 하려면 꼭 전날에 빈 강의실을 대여해서 연습을 했었고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노심초사하는 자신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고 즐겨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을 신기해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난 어릴 때부터 이런 성격이었고 천성이 쉽게 바뀌진 않는다는 것을 요즘 더 새삼 느낀다. 


축구 선수를 꿈꿨던 중학생 때 중요한 경기에서 새가슴이 되어버린 순간을 10년이 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달리기가 가장 빨랐지만 맨 끝반이었기 때문에 운동회 때 마지막 계주 주자를 뛰어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너무 부담스러워 두 번째로 빠른 친구에게 나가라고 양보했다. 난 개인전에서 1등을 했지만 운동회의 꽃은 계주였기에 영웅이 된 건 마지막 주자로 역전해서 골인한 두 번째로 빠른 친구였다. 학교 내에서 인기가 많았던 귀여운 친구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그림이 더 멋지니까 나쁘지 않다며 스스로 위로했던 13살의 나를 생생히 기억한다. 



앞으로도 내가 힘들어하는 순간들을 분명 맞이하겠지만 조금 더 의연해지기로 했다. 사람마다 강점과 약점은 다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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