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각인>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소련이라는 국가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검열과 통제가 일상인 이곳은 눈 뜨고 코 베이기가 상식이었다.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이 나라와 검열관에게 처참히 가위질당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봐야 했다. 자신들의 계획에 걸리적거리는, 나라에 저항하고자 하는 작품들은 국가의 손길로 다시 태어나 ‘안전한’ 작품이 됐다. 예술가라는 그림자는 국가의 위대한 목표와 희망이라는 빛에 은폐되고 그의 작품은 죽은 물체로 남았다. 예술가가 보존하고자 했던 한 줌의 희망과 저항의 잔재마저 쓸어가 버리는 소련의 목표는 유토피아 건설. 위대한 국가에 어울릴 법한 인민을 만들기 위해 국가는 대대적인 세뇌 실험을 강행했다. 인민의 지성과 감성을 움직이는 예술가들은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국가에 의문을 품고, 저항하고, 회의와 불만을 품은 예술가는 검열의 감시탑 아래서 외부와 내부 갈등에 직면했다. 영화감독이자 영상의 시인으로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그 중 하나였다.
감시탑 아래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이는 국가에 빌붙어 국가의 행실을 유려한 언어로 칭송하며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는다. 어떤 이는 저항을 시도하다 행방이 묘연해지고 어떤 이는 저항의 의미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 타르코프스키는 카메라와 펜을 든다. 치열할 정도로 그가 탐구했던 대상은 예술의 목적과 그에 따르는 예술가의 책무였다. 그는 예술적 탐구를 게을리 한 감독을 비판하고 물질주의가 도래한 20세기에 예술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 예술계를 안타까운 눈으로 본다. 그가 봤을 때 예술의 목적은 ‘자신만의 사상을 형성해줄 자신의 표현 체계에 대한 탐색’이다. 인민의 절대적인 충성을 강조한 국가 앞에서 그가 염원했던 것은 자신만의 사상이었다. 자국이 그토록 궤멸시키려 한 그것을 타르코프스키는 평생토록 갈구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국을 향한 비판은 최대한 접어두고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방법론은 두 개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시와 믿음이다. 그는 논리와 인과보다도 시의 압축성이 예술 미학의 절정이라 본다. 시적인 미학, 그것은 시적인 사유 체계에서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에게는 인간의 사유 체계 역시 논리와 인과의 적절한 배열보단 불현듯 떠오른 어떤 이미지와 같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 역시 논리를 따지기 전에 그 논리의 시발점이 되는 순간을 불현듯 만난다. 그것은 한 줄의 문장일 수도 있고 하나의 멜로디일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순간을 이미지로 만난다. 그 이미지를 믿고 거기서 생각을 발전시켜 타르코프스키는 자기 영화를 만들었다.
또 다른 방법론 중 하나인 믿음은 어떻게 보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의 각인>에서 그가 내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다. 무엇에 대한? 그것은 ‘소명에 대한 믿음’, 인간의 정신에 대한 믿음, 예술을 통해 가닿고자 하는 이상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의 이상은 자국의 이상과 다른 지점에 있다. 소련이 완전한 강국을 지향한다면 그는 절대적인 개인의 진리를 지향한다. 예술가로서의 책임 의식과 진리를 갈구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타르코프스키는 믿음을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봐도 자신의 이상을 밀고가기 위해 믿음은 필수조건이다. 자신의 사상, 종교, 이상에 대한 지향은 적절한 논리와 함께 올곧은 믿음을 동력으로 삼는다. 믿음을 도외시하고 절대적인 사실(Fact)만을 중요하게 보는 지금 사회에서 타르코프스키의 말은 천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달리하면 그의 말이 마냥 무시 받을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저마다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오로지 논리와 인과로만 똘똘 뭉쳐 있다면, 그것이 무너진다 한들 가치관을 평생 탑재하고 산 개인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가치관의 붕괴는 논리적으로 잘 직조된 문장 구조의 파괴가 아니다. 이 붕괴가 개인에게 가져오는 불안과 비참은 거기 내재돼 있던 믿음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다. 믿음은 상대방한테 인증할 수 없는 마냥 추상적인 관념이다. 증명과 인증은 SNS가 생활화 된 지금 시대가 가장 요구하는 행동이다. 만약 개인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물질이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럴 수도 없는 사람에게 비가시적이고 그저 말뿐인 믿음은 가치가 있을까. 타르코프스키는 그렇다고 말한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반문하겠다.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을 어디 내놓아야 하는 물질로 환원하기보다 믿음을 안고 그는 자기의 예술성을 개발시키는 쪽이었다. 믿음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외침의 이유는 이런 방법론을 가지고 그가 평생 일곱 편의 영화를 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각인>에는 여성 관객으로부터 그가 받은 편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영화 <거울>에서 자신의 삶을 봤다는 감격에 젖은 글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는 믿음을 굳혔다. 자기 영화를 모두가 비난할 때 그 영화와 한 몸이 된 관객의 애정 섞인 편지는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해줬다.
<시간의 각인>은 예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한 예술가가 감시탑 아래서 적어내린 고뇌의 연대기다. 국가로부터 당한 갖가지 수모와 일상에서 받은 조소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남들과는 다른 지향점을 향해 외로운 길을 떠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헤쳐 나갈까. 조국과는 다른 길을 걷고 감시탑 아래서 평생을 보낸 예술가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절대적 진리에 목말라 한평생 우물을 판 타르코프스키의 결과물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샘이 되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