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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Feb 06. 2023

데이빗 크로넨버그에 관한 단상

크로넨버그의 어린 시절은 자기 부모가 걸린 한 전염병으로 인해 기구해졌다. 발병의 시작은 모친이었는데 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병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전염되는 병이었고 그녀를 간호하던 부친 역시 몸이 굳어갔다. 이후 아내보다 먼저 숨을 거둔다. 시간이 지나 모친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이 참담한 현실을 지켜봐야 했던 어린 크로넨버그에게 이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은 그의 초기작부터 해서 최근 영화들까지 인체와 강한 연관을 맺는다. 이것들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낳은 작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관되게 역겨운 이미지들을 선사하는 그의 스타일은 뜬 눈으로 보고 있기가 힘들다. 차라리 머리가 터지거나 갈라진 뱃속에 손을 집어넣는 비현실적 이미지의 연속이라면 영화와 그걸 보는 현실의 나 사이에 철저히 선이라도 긋는다. 그는 <비디오드롬>처럼 여자의 귓볼에 핀을 찔러넣어 흐르는 피를 아주 가까이서 보여주 보는 사람 학을 떼게 만든다.


이렇게 처음으로 어떤 창작자에 관한 글을 쓰는데 크로넨버그의 초기작 다섯 편을 보면서 느껴지는 어떤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필모그래피 순서대로 영화를 보는 중인데 그의 영화에서 발견된 공통점과 가치관이 다음 작품에 대한 묘한 흥미와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파편들>, <열외 인간>, <브루드>, <스캐너스>, <비디오드롬>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떤 공간에 갇혀 있다. 이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인물들이 건물에서, 자동차에서, 교통수단에서 나와 길을 산보하거나 자연경관을 즐기는 모습을 한 차례도 볼 수 없다. 그들은 철저히 어떤 목적을 안고 걷는 자들이며 목적지는 결국 건물 안이다. 크로넨버그의 인물들은 방황하지 않는다. 다들 직업이 있고 목적이 있고 욕망이 있다. 한 마디로 잃을 게 다. 어떤 이는 더 좋은 사람을 개발하기 위해 기생충을 만들고 어떤 이는 겨드랑이에 숨겨놓은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 어떤 이는 자기 이익을 위해 환자와 가족을 떼어놓으려 하고 어떤 이는 현재와 환상의 중간에서 혼돈에 빠진다.  영화들의 공통된 소재는 현재의 기술로 만든 발명품과 인간의 합체다. 합체를 목표하거나 이미 초능력하고 결합된 인간의 등장. 현대 기술은 인간을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인간 또한 그것에 매력을 느껴 둘은 분리되려 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 내내 건물이나 자동차 안에 있다는 사실이 과연 우연일까. 현대 의학, 건물, 자동차는 현대인과 떼어놓을 수 없는 3요소다. 누가 이것들과 분리되지 못하게 했나. 발명가인가 소비자인가.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보면 발명자와 소비자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소비자였던 사람이 그 소비로 인해 기괴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그것은 또다른 파멸을 부른다. 이 결정된 파멸의 궤에서 빠져나오려면 현대의 발명품을 향한 구매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데 이걸 어쩌나. 크로넨버그 영화의 결말은 인물들이 차에 타있거나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끝난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결말이 아쉽지만 나는 그의 다음 작품 보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어떻게 가치관이 변하는지 보고 싶다. 크로넨버그는 현대 문명에 갇힌 인물을 보는 허무주의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을 자기 초창기 영화에 새겼다. 커리어의 시작부터 이런 세계를 보여준 감독이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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