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부리 지기기 1
김천은 포도밭 천지다. 넓은 들판을 가득 채운 줄 맞춘 비닐하우스가 흐르는 은빛 강물 같다.
20년 전 내가 살 때도 포도곳이었지만 점점 더 포도밭이 늘어나 지금은 논도 밭도 산비탈 조각 밭도 다 포도 비닐하우스다.
포도도 유행이 있어 최근 몇 년은 샤인머스킷이 대세다. 비싼 값이 더 귀한 포도로 인기 몰이를 하니 포도 하면 떠오르는 검은 포도는 순식간에 밀려나고 대신 샤인머스킷이 자리를 거의 차지했다. 포도 씨도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어 편한 데다 알이 굵고 당도가 높아서 엄청 비싼데도 한 알씩만 먹어도 그 가치를 한다 했다. 특히 아이들은 씨앗과 껍질 귀찮아 안 먹는데 이 포도는 잘 먹는다고.
포도 알 하나 먹고 껍데기 안쪽을 쪽 빨아먹으면 진한 자주색 벨벹같은 달콤함이 손까지 묻어나던 검은 포도. '포도 씨 그냥 먹냐, 빼고 먹냐, 씨가 몸에 정말 좋대, 씨도 씹어서 먹는다'라는 포도 먹을 때 서로 하는 이야기도 검은 포도가 없으니 할 일이 없어지고 손톱 아래 새까맣게 포도물이 들 일도 없어졌다.
아무리 씻어도 틈 없이 꽉 찬 실한 포도송이 속에까지 못 씻어 먹다 보면 꼭지 쪽에 묻은 찌꺼기 때문에 휴지에 문질러 닦아 먹는 일도 없어졌다.
샤인머스킷은 그런 모든 불편함을 다 없앤 혁명적인 포도이긴 하다. 하지만 너도 나도 돈이 되는 샤인 머스킷을 심다 보니 과잉 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하고 이제는 누구나 그냥 사 먹는 익숙한 포도가 되었다. 처음의 신선함도 고급짐도 다 평범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잊힌 검은 포도 맛을 그리워하게 된다.
잘익은 포도 한 송이 나눠 먹고 쟁반에 빈 포도 꼬투리만 남았다. 서로 밀치며 비좁던 꽉찬 몸이 헐렁, 텅 비었다. 꼭지들은 포도가 삶을 끝낸 마침표 같다. 포도 알맹이를 잡고 있던 심이 솔처럼 남아 꼭지들은 작은 꽃이 핀 듯하다. 다 못 자란 포도 알맹이에 초록색 미련이 맺혀있다. 예뻐서 사진을 찍어본다. 버리지도 못한다.
꼭지가 말라 갈색이 되고 단단해진다.
명함 꽂이가 반하여 말라 비틀어진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 둘이 같이 살고 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다.
꼬투리 잡기 성공이다.
(2024년 8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