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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Jun 18. 2023

꿈만 같던 하루

  인생을 살다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을 싶을 때마다, 현실에서 빗겨 난 채로 낭만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과거의 나를 꺼내 보고 싶을 때마다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이름도 같고 키도 같아 운명이 아닐까 싶은 친구. 잘하든 못하든, 좋든 좋지 못하든 내가 어떤 행동과 말을 해도 멋대로 평가하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는 친구.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한없이 소중하고 벅찰 때가 있는 친구.


  각자 삶을 열심히 살다가 1년 만에 만났다. 안타깝게도 친구는 전주에 살고 있어 자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랬듯 어제 본 것처럼 편안했다. 친구와 먼저 시간을 보낸 후에 남자친구와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두 사람과 하루를 함께 보내다니, 나로서는 너무 좋았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진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만난 후부터 단 1분도 어색한 시간이 없었다. 해방촌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숨겨진 미식의 장소에 찾아가고, 근사한 야경에 덤으로 어디선가 터지고 있는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빛나는 시간을 보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평소에 지녔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누군가가 무심코 꺼낸 주제에 소란스럽게 생각을 나누면서 연신 '행복하다'라고 외쳤다. 연고가 절대 없을 두 사람이 나로 인해 만나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 두 사람 모두 나와의 추억들이 깊기에, 그 추억의 한 갈래가 같은 곳에 합쳐지는 것을 보니 낯설고 신선하며 꿈만 같았다. 진심을 다해 그 시간을 즐겨 준 이들에게 고마웠다.



  결국 막차가 끊겼지만 우리의 시간은 해방촌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와 남자친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영화이자, 내 친구가 보면 분명 감탄을 금치 못할 영화인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우리 집에서 함께 보기로 했다. 6평 남짓한 작은 원룸에 침대는 더블 사이즈였지만 무리 없었다. 나를 중심에 두고 한 명은 내 다리에 눕고 다른 한 명은 내 어깨에 기대어 누구 한 명 졸지 않은 채로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서래와 해준의 목소리에 우리의 숨죽이는 소리와 중얼거림, 웃음 또는 한숨 소리가 섞여 작은 방을 가득 매웠다. 양 옆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온기에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끝나더라도 빠르게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꿈만 같이 낯설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자친구는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도 다음 날 전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나이지만 어제의 시간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인 걸까. 흔적만 남긴 채 모두가 돌아간 일요일은 견딜 수 없이 공허했다. 내일은 월요일이고 한 주가 시작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아직도 그 시간 속에 남아 있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 글을 쓴다. 소중했던 순간들의 잔향을 남겨 두고 싶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두고 싶어서. 여운을 간직한 채 앞으로 다가올 더욱 아름다운 순간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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