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프 Nov 10. 2021

열네 살, 아들램에게

영화 "타이타닉"



내가




세상의 왕이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거실 테이블 위 노트북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집사람이 방에 있던 아들램을 옆에 불러앉혀 뭔가 얘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그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될 거 같아 저는 안방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죠.  잠시 후 아들램은 친구 만난다며 밖으로 나갔고 이번엔 집사람이 저를 거실 테이블로 불러 내는 거예요.   서재방 PC는 대부분 제가 쓰고 거실 테이블 위의 노트북은 주로 아들램이 쓰고 있는데 집사람이 그 노트북 검색기록들을 살펴보니 드디어, '피 끓는 사춘기'의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더란 겁니다.  마블이나 영화 관련 유튜브 영상들 사이로 틈새 틈새 살구빛 가득한 영상들이 스트리밍 되는 사이트 흔적들이 보이더란 거죠.


  벌써 그럴 땐가 싶어 생각해보니, 저 역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시뻘건 도색잡지를 처음 접했던 게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더군요.  신세계    가끔씩 학교서 폐지 수집하면 집에 숨겨둔 책들 가져와 우르르 구경하던 그때완 달리 초고속으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쓰이는 지금은 점점 그 시기가 당겨지는 듯하죠.  사실 동네 형아들 득시글대는 태권도 학원을 유치원 때부터 계속 다니고 있어서 분명히 보고 듣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지만 이렇게 막상 닥치니 집사람과 저도 좀 당황했습니다.  계속 그저 꼬맹이로만 보였거든요.


  집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뭔가 조곤조곤 얘기를 해준 듯했고요, 이제 저에게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얘기를 좀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네요.  음,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쯤, 뭔가 낌새를 느끼신 아버지가 은밀한 '자기 위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가 어정쩡하게 대화가 급 마무리된 기억이 있거든요.  점점 자라는 아들램을 보면서 가끔씩,  에지 있고 간지 나게 '어른의 대화'를 해주는 저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멋진 호숫가에서 함께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아 쿨하게 조언을 해주는 그런 폼나는 아빠의 모습?  아들램이 저녁에 들어오면 뭔가 얘기를 해보라는 집사람의 말에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긴 했습니다.  아들램도, 분명히 엄마가 그 얘길 아빠에게 전했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테죠.


  근데 막상 각 잡고 무슨 얘기를 해보려니... 굉장히 어색해집니다.  일단 아무렇지 않게 그냥 즐겁게 저녁을 먹고 네 식구가 거실에 누워 함께 영화를 보는 '토요 주말극장'용 DVD를 뒤적거렸어요.  대부분 슈퍼 히어로 영화, 판타지 영화, 혹은 SF영화나 애니메이션들이었죠.  하지만 이 날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한 편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상영시간 자체가 3시간 20여분에 가깝고, 영화 절반이 그냥 평범한 드라마나 멜로로 진행되는 데다 중간엔 아주 살짝 민망한 장면들도 있어서 좀 더 크면 보여줄 거라고 계속 미루던 작품.  이젠 이걸 함께 볼 만큼 큰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램에게 물었어요.

"이거, 100년 전쯤 실제로 큰 배가 침몰해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던 얘기거든.  볼래?"

좋답니다.  보고 싶다고.  아들램의 노트북에서 야동 사이트의 흔적을 발견한 역사적인(?) 그날에 그렇게 함께 의기투합 해서 꺼내 본 영화는 바로 이 영화, <타이타닉>이었어요.






               

우린 절대 '침몰'하지 않아,  이 타이타닉처럼.




1912년 4월 14일 차갑던 그날 밤




1500명의 무고한 목숨과 함께




그 배는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이 '고전'을 엄마아빠랑 함께 보는 꼬맹이들의 감상이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잭(레오나르도 디키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멜로가 쭉 이어지는 중반부까지는 솔직히 좀 지루해하는 거 같았어요.  여성을 거의 남성의 종속물로만 보던 그 시대상이나, 1등실 손님들로 그려지는 당시 상류층 귀족들의 속물적 위선들을 함께 짚어내며 감상하기엔 당연히 아직 이를 테죠.  심지어 전 세계 수많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당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꽃미모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유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꼬맹이들에겐, 미간에 주름살 가득한 무서운 인상의 연기 잘하는 중년 아저씨 배우, 딱 그런 이미지니까요.  영화 중간쯤에 있는 케이트 윈슬렛의 올누드 크로키 장면은(DVD판에만 있습니다) 상하 두 개로 나눠진 DVD 디스크 갈아 넣을 때 교묘하게 제가 '밑장빼기'를 하고 넘어갑니다.  그렇게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고 점점 녀석들의 관심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쯤,


  서로 교대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던 두 꼬맹이들이 타이타닉호가 커다란 빙산에 부딪치는 그 순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봐온 판타지나 히어로 영화들에서 그냥 엑스트라 같은 일반인들이 전투의 와중에 끼어 죽어나가는 장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던 모양이에요.  타이타닉호에 관한 이야기는 <서프라이즈 TV>와 같은 방송 프로그램들에서 대략 들어봤을 테지만 이렇게 생생히 현장을 생중계하듯 지켜보게 된 건 처음이었거든요.  

가상인물인 주인공 잭과 로즈가 거기에 있었단 사실만 빼면, 빙산에 충돌한 뒤로부터 대다수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 사고 현장에서의 행적들은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과 증언들을 통해 그대로 재현된 '사실'들입니다.  그날 밤 총 2,200여 명의 여객선 탑승인원 중 삼분의 일이 살았고 나머지 삼분의 이는 배 안에서, 혹은 차가운 바다에서 숨졌죠.  눈 한번 안 떼고 그 장면들을 쭉 지켜보던 꼬맹이들이 좀 의아해했어요.  그리고 궁금해했습니다.  대부분 죽어갔고 일부는 살아 남아요.  그렇다면 저런 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지,  또 그걸 어떻게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그 수많은 삶과 죽음의 양상들을 쭉 내내 함께 지켜보면서 말이죠.





              

선장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구명조끼를 양보하며 책임을 지려했던 이들과




직분을 다하고 대부분 사망했던 선원들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온 이들도 있었고




저들이라고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누군가의 곁에  스스로 남은 이들과




평생 살아남은걸  부끄러워해야 할 인간들까지






  네, 그런 시각에서 이 '타이타닉' 침몰 사고를 다시 되짚어볼까요.  역사에 남아있는 대형 선박사고 사례들을 보면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가라앉거나 혹은 제대로 된 통제가 없었을 경우 전체 생존자 수가 채 1%도 되지 못했던 경우가 수두룩해요.  특히 질서가 무너진 상태로 남녀노소 뒤엉켜 대피하려는 상황에선 당연히 신체적 약자인 여성들과 특히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가장 높습니다.  


  한데 이 '타이타닉' 사고만을 들여다보자면 1,2,3등실 구분 없이 여성들은 탑승객 중 74%가 생존했고 어린이들은 51%가 생존한 반면에 탑승객과 선원들 포함 모든 남성들 중에선 단 20%가 생존한 걸로 집계되었어요.  극 중에선 속물들로만 묘사되던 1등실 남성들도 그중 3분의 1만 구명보트에 탑승해 살아남았고 2등실, 3등실, 승무원 남성들의 경우 구명보트 탑승을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양보하고 단 20%만 살아남았던 거죠.  영화 속에선 잭과 로즈의 멜로를 더 부각하기 위해 마치 3등실 승객들의 갑판 출입구를 의도적으로 막은걸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답니다.  3등실 선실들 자체가 미로처럼 복잡한 갑판 하부 쪽에 몰려 있어서, 구명보트가 있던 상갑판에 일찍 도착하는 게 상대적으로 늦어졌던 이유가 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타닉호의 승무원들은 '원칙'에 따라 객실 등급 상관없이 구명보트에 도착하는 대로 '여성과 어린이 먼저'라는 절차를 지켰고 대부분의 남성 승객들은 그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원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런 상황에선, 사실 다 필요 없고 무조건 나부터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럼에도 저 때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런 '원칙'을 따랐던 이유는 뭐였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생각 차이?  아, 그런 젠더적 관점에서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에요.  그런 요지가 아닙니다.  제가 저 배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를 떠올려봤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모든 사람들이 다 구명보트에 탑승할 수는 없어요.  물론 언제 구조대가 올지,  그리고 보트에 타지 못했을 때 저 차가운 물에서 얼마나 버틸지 알 수도 없죠.  분명히 죽을 거란 생각들이 들 거예요.  한데 내가 구명보트에 탑승하지 않아서 내 아내와 아이들이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암묵적인 룰이 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라면, 그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대부분 그랬을 거라 봅니다.  저도 그렇게 따랐을 거 같으니까.  

만약 모두가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고 아귀처럼 앞다퉈 구명보트들에 매달렸다면 저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서 아마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을 거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말이죠, 이 사고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500명의 엄청난 인명들이 희생된 비극임과 동시에,  그래도 오히려 700여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이후 훨씬 더 발전된 시대에서의 비극적 대형 선박 재난사고들과 비교해서도 말이에요.






  

아들,  이 영화는 이게 다가 아니란다







이곳에선




우리 모두가 1등실 사람들






   주인공인 잭과 로즈의 그 '땀내 나는' 로맨스에 가려져 더 자세히 부각되진 못했지만,  실제 이 비극의 밤엔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희생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현재 물가로 1억 원짜리 승선권을 껌값처럼 지불했을 정도로 '잘나신' 1등실 상류층 승객들 중 다수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남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해요.  극 중에서 침대에 함께 누워 최후를 맞이하던 노부부의 모습은 노인 남성의 탑승이 허용되는 구명보트 승선을 스스로 거부하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다'며 하녀에게 선뜻 탑승을 양보했던 뉴욕 메이시 백화점 소유주 스트라우스 부부를 모델로 한 겁니다.  


  무엇보다, 타이타닉호의 승무원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자리에서 직분을 다하고 희생되었죠.  전체 승무원 800여 명 중 대부분이었던 기관실 화부 기술자들은  침몰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전력과 펌프 시설을 끝까지 유지하게 위해 악전고투하다 탈출도 하지 못한 채 전원 사망했어요.  침몰 직전까지 구조 신호를 보내던 두 명의 통신 기사도 결국 그 통신실에서 사망했고,  모조리 사망해버린 우편 담당 승무원들 역시 그 혼란의 와중에도 승객들 우편물들을 끌어내려 애쓰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하죠.  사람들이 안심하도록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던 벤틀리 악단,  배가 다 들려진 상황에서 여타 종교 구분 없이 울부짖던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일일이 기도를 올려주던 목회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배 위의 모습들 모두가 '실제'였습니다.  


  이미 개봉관에서, 그리고 DVD와 TV를 통해 대여섯 번도 넘게 감상했던 이 작품에 대한 이런 새삼스러운 사실들을 다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읊어대고 있는 건, 엔딩 크레딧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들램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예상 밖의 질문 하나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아빠, 근데 왜 예전 세월호 침몰 때는 선장님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갔어요?  형, 누나들은 안에 다 있으라고 해놓고?  저렇게 춥고 먼바다도 아니고 육지 가까운 곳이었는데?" 

선뜻 무슨 대답을 해주기가 참, 먹먹했습니다.  맞아요, 대체 왜 그랬었을까요 그때 진도 앞바다에선.  저 타이타닉호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백 년도 훨씬 옛날이었는데, 막상 몇 년 전 그때의 우리는...  



 






  자, 멋지고 에지 있게 아빠이자 같은 남자로서 제대로 성교육을 시켜줘야 하는데 아직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잘 몰라서 여전히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어요.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후 '토요 주말 극장' 타임 때마다 예전엔 보여주지 못했던 '어른들 영화'를 틀어서 함께 보고 있을 뿐.

지난 주말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함께 봤어요.  진작에 보여주고 싶었던 훌륭한 작품이지만 앤 해서웨이가 연기했던 판틴이 딸 코제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는 그 장면이 걸려서 보여주지 못했었죠.  가슴이 미어지는 'I Dreamed a Dream'의 그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까진 깨닫지 못하겠지만 아들램은, 마치 절규하는 듯한 그 노래 장면에서 눈 한번 떼지 않고 집중하며 지켜보고 있더군요.  너무 진지해 보여서 살짝 우스웠습니다.  죄와 벌, 증오와 용서, 희생과 관용, 화해,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 유치원 다닐 무렵 아빠랑 같이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읽었던 어린이 전래동화 '레미제라블'이 실은 그렇게 깊고 풍부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고 느끼게 된 건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죠.  그럴 리가요.  한데 이미 수차례 본 영화라 잠시 졸았던 저와는 달리, 아들램은 누나와 함께 그 영화 <레미제라블>을 자리 한번 뜨지 않고 숨죽여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타이타닉>을 보고 보고나서처럼, 뭔가 꽤 상기된 표정이기도 했어요.  


  그렇겠죠, 아마 아들램은 이렇게 앞으로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깨달으며 커 갈 겁니다.  그게 대단하고 고상한 진리나 지혜가 될 수도 있을 테고  혹은 아주 시답잖고 하찮고 부끄럽고 때론, '나쁜 것' 일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그랬듯이, 때론 수많은 '헛질'들로 야금야금 삶을 낭비할지도 모릅니다.  부모인 제가 더 이상 보호하거나 카바를 쳐줄 수 없는 그런 순간들도 맞이하게 되겠죠.  모쪼록 그럴 때가 왔을 때, 아들램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그런 일종의 기준과 원칙들을 자연스레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에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아예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결코 되지 않았으면 하죠.  그렇게 자연스레 하나씩 배워갔으면 합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부딫쳐가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에서,  보석같은 책이나 영화들속에서, 혹은 많은 사람들과의 부침을 통해서든.  심지어는... 그 찐한 살구빛 '야동'들을 통해서라도, 숨겨진 삶의 법칙들을 발견해내길 말이에요.













#. 열네 살의 아들램은

     이제 열다섯 살의 아들램이 되었습니다.

     이젠 꽤 '잘해요'.

    아예 컴퓨터와 핸드폰은 잠금상태.

    시청기록이나 검색기록 따윈

    절대 남기지 않는 깔끔함.

    든든하군요.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린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