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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Dec 06. 2021

걷잡을 수 있다면, '리듬'이 아니지.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




<베이비 드라이버> ost.   라이오넬 리치가 1977년 그룹 Commodores 시절에 불렀던 명곡 'Easy'.

















  2017년 10월.  

  부산에서 베트남 다낭으로 가는 케세이 드래곤 비행기 기내 영화 목록에서 이 작품 <베이비 드라이버>(Baby Driver)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국내 개봉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던 따끈따끈한 신작이었죠.  액션과 음악이 결합된 독특한 작품이란 입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아싸,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비행기가 이륙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쯤 곧바로 이어폰을 끼고 감상을 시작했죠.       


  하지만  영화를 이십여 분쯤 보다 말고 꺼버렸습니다.  영어 음성에 한국어 자막이 아니라 아예 한국어 음성 더빙판이었고, 무엇보다 수시로 나오는 안내방송 때문에 영화가 계속 끊어져 당최 집중이 안되더군요.  비행기 엔진 소리와 주위 소음에 묻혀 음악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간신히 감상하고 있던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저 평이했습니다.  그리 열광할만한 작품은 아닌 거 같은데? 라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 정지 버튼을 눌렀고, 이리저리 목록을 다시 골라 다른 영화를 마저 감상했던 기억이 나요.  

네, 솔직히 그때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그랬습니다.  오프닝부터 보여주는 자동차 추격씬 하나는 분명 새끈 했지만 당최 작품에서 끌릴만한 뭔가를 느끼진 못했죠.  심지어는 살짝 어벙해 보이는 주인공 '베이비'(안셀 엘고트)의 모습도 그다지 정이 가질 않았습니다.


  며칠 뒤  베트남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이 작품을 골라 이어볼까 망설이다가 곧 다시 접었죠.  아무래도... 이렇게 대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기내 영화로 볼 작품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행 다녀온 후에도 한동안은 이 영화를 잊고 있다가 어느 기분 꿀꿀한 늦은 밤에, vod 유료 결제로 이 작품을 드디어 다시 찾아봤습니다.  한밤 거실 TV 앞에 혼자 앉아서, 조용히.


  영화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얼마 전 비행기에서 감상할 때와는 다른 뭔가가 느껴졌어요.  제작사 로고가 화면에 뜨자마자 '삐~~'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립니다.  잡음인가 하고 갸웃했는데 그건 바로 '이명' 소리였어요.  주인공 '베이비'가 영화 내도록 음악을 속 듣고 있는 이유라는 그 기계음 같은 귀울림 소리.  저 역시 꽤 오래전 심하게 중이염을 앓고 갑자기 생긴 귀속 '이명'소리가 늘 있어서... 그 소리를 단박에 느낄 수 있거든요.  기내 영화로 이 작품을 볼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깨알 같은 디테일이었죠.  그리고 그 멋들어진 오프닝과 함께 시작되는  The John Spencer Blues Explosion의 노래 'Bellbottoms'.  와, 새삼 쩔어요.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이었지만 저절로 리모컨 볼륨을 자꾸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신나게, 온전히 이 작품을 뒤늦게 감상하고서야 깨달았어요.  음성과 음향, 음악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감상한다는 건 말입니다,  수프를 전혀 뿌리지 않은 맹숭맹숭한 라면을 억지로 들이키는 경험과 다름 없는거였.  글쎄 이런 영화를 애초에 그렇게 허투루 보려 했다니.





      







오빠야,  지금 내한테




반했나






  

이 독특한 범죄액션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를 연출한 이는 영국 출신의 영화감독 겸 각본가 에드가 라이트입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년),  <뜨거운 녀석들>(2007년),  <지구가 끝장나는 날>(2013년),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년)등의 작품들을 연출했죠.  폭넓게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예측불가의 센스와 감각적인 연출, 특유의 코미디 코드로 마니아들에겐 꽤 지지와 호평을 받는 감독이에요.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도 전반적으로 꽤 호의적이죠.


  의외의 절묘한 OST 선곡들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도 자신의 작품 속 OST 선택에 남다른 감을 보입니다.  이 작품 <베이비 드라이버>의 오프닝에서부터 그래요.  곱상한 얼굴에 과묵하고 무표정하던 '베이비'(안셀 엘고트)가 실은 어떤 인물인지를 확 체감하게 만들었던 오프닝 추격씬의 그 곡 'Bellbottoms' 역시, 이 장면에 쓰기 위해 20여 년 전부터 그가 미리 낙점해둔 곡이었다고 합니다.  극 중 모든 음악들이 그저 액션의 배경음으로 은은하게 깔리는 수준이 아니에요.  인물들의 대사, 움직임, 심지어 수많은 차들이 쫓고 쫓기는 그 수많은 액션들의 합이... 삽입곡들의 반주와 리듬, 멜로디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게끔 배치해 뒀죠.  말하자면 영화의 특정 분위기를 위해 음악을 단순히 삽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가 오히려 그 음악들을 정확히 따라가는 그런 느낌?  

Bob & Earl, Carla Thomas, The Beach Boys, The Damned, T.rex, David McCallum, Simon & Garfunkel, 그리고 Queen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의 수많은 명곡들 다수가 이 작품 속에선 또 다른 '주인공' 그 자체입니다.  극의 서사와 연기, 연출, 심지어 개별 장면들의 편집까지도 철저히 계산되어 이 곡들과 딱딱 들어맞게 작품 속에 한데 버무려져 있죠.  이렇게 짜여진 곡들이 극 중에서만 무려 30여 개.  인물들이 대화를 이어가다 노래하고 춤추는 전통적인 뮤지컬 형식과는... 또 그 느낌이 현저히 달라요.  


  은행 강도단, 기막힌 실력의 드라이버, 달다구리한 로맨스, 연인들의 시련, 그리고 한바탕 몰아치는 액션과 뻔한 결말.  그것만 놓고 보자면 정말 수없이 만들어져 왔던 흔한 범죄영화 중 하나일 뿐이죠.  한데 주인공 '베이비'가 내내 듣고 있는 그 모든 음악들에 절묘하게 맞춰진 '합'들로 인해서 이 특이한 음악영화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포맷으로 거듭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선지 범죄와 살인, 도주라는 은근히 어두운 내용들을 담고 있음에도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가 어둡고 암울하다기보단 의외로 굉장히 밝고 경쾌해요.  통통 튀는 학창 로맨스물을 보는 느낌이기도 하죠.  인생의 어느 한때, 누군가를 몰래 훔쳐보며 심쿵했던 그 '음악 같은' 순간을 슬쩍 떠올리게도 만드는... 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는 게 빡세지만,

              



너를 보면




내 귓속엔




종소리가 들려






  물론,  중반부 이후 내러티브 흐름에 대한 아쉬움들은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론 그런 점들이 이 작품의 매력을 흐릴 만큼 튀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솔직히 '왜 저러는가'에 대한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서 더 좋았어요.  이 독특한 '음악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려 하는 게 캐릭터들의 치밀하고 촘촘한 '서사'는 아니었죠.  영화가 음악이 되고, 다시 음악들이 영화가 되는 그 신박한 경험에 그저 자연스레 몸을 맡기면 됩니다.  이 영화를 가장 '깔쌈하게' 감상하는 방법.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고, 몸을 까딱이고, 그 공기의 진동이 만들어내는 파동들을 통해 내안의 숨겨진 바운스를 둠칫둠칫 느껴 보는 것.


  엄청난 미션들을 수행하는 프로페셔널 드라이버들의 이야기,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같은 액션물과는 애당초 결이 다른 작품이에요.  어질어질하게 만드는 쉐이키 캠 촬영기법이나,  초 단위로 끊어내는 눈 돌아가는 현란한 편집도 거의 사용하진 않습니다.  꽤 감각적이고 경쾌한 템포로 그려지는데 또 묘하게 아날로그적이고 고전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작품이죠.  알고 보면 굉장히 '작은' 얘기예요.  불우한 개인사로 인해 선과 악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던 앳된 청년이,  소중한 존재를 만나게 되면서 진짜 삶을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  맞아요, 참 뻔한 이야기죠.  한데 그 뻔한 것들을, 뻔하지 않게 전달하는 그 새로운 포맷의 시도 자체가 굉장히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샌님처럼 멍하니 운전석에 앉아 있던 '베이비'가 느닷없이 보여주던 강렬한 헤드뱅잉, 귓속 음악소리에 맞춰 무심하고 시크하게 보여주던 손가락 연주,  이어폰을 나눠 낀 두 청춘 남녀가 빨래방 의자에 앉아 보여주던 사랑스러운 발 맞춤.  지루한 일상의 순간들에 음악이 덧입혀진, 그 마법 같은 순간들에 혹시 조금이라도 심쿵했다면... 분명 이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부산에서 베트남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첫 만남'은 제게 그저 싱숭생숭 했었죠.  이 작품의 그 무엇도 제 가슴을 뛰게 만들진 못했습니다.  솔직히 비호감이었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두 번째 만남'에서 급기야, 기어이, 훅 빠져 들었습니다.  계속 만날수록 더 헤어 나오지 못하겠죠.

이젠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모든 이미지들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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