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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Jan 06. 2022

우린 모두 다, 아파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너나 나나



정상은 아니야






            " 아무래도, 정신병자 같아. "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든 아님 서로 철저히 무시하든 간에,  오래 동안 누군가와 지긋지긋한 감정싸움으로 치닥거리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그 생각뿐이었어요.

  

어떻게 저리 정신병자 같지?


감정의 극단을 곧잘 오고가는 K는 어쩌면 조울증인가 싶고,  모든 게 자신에 대한 음모라며 시시때때로 예민해지는 J에겐 무슨 피해 망상증이 있나 싶었죠.  업무에서부터 인간관계까지 모든 걸 딱 자신의 스타일대로 따르지 않음 당최 못 견디는 S는 깊은 강박증이나 편집증이 의심됩니다.  무엇보다 그 징글징글했던 끝판대장 C는 주위 사람들을 죄의식 없이 착취하는 심한 자기애적 성격 장애가 굉장히 중증으로 보였죠.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정신적 결함이 있는 건 아닐까 싶지만... 문제는 그들도 다 각자 머릿속에서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단 거였어요.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나 빼고 너희들 다 이상해.'라고.


  잘 나가면 그게 얄미워서 비정상이고, 말이 많으면 그 아는 체가 미워서 비정상, 반대로 말이 없으면 그 답답함에 짜증 나서 비정상이 되죠.  뒤처지면 그 부족함이 못마땅해서 또 비정상이란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  결국 그렇게 따진다면 이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그 누구도 조금씩은 정상이 아닌 거잖아요.  달리 말해서 모두가 비정상인 그 상태 전체가, 오히려 정상인 걸로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혼란스러워져요.  뭐가 정상인지 아닌지, 누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점점 구분하기 힘들어지죠.  그럴수록 점점 더 은연중에 자기 암시를 거는 걸까요.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  이건 내 문제라기보단 사실 저 인간들의 문제인 거지라고 결론을 내리면...  한결 수월하고 편해집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부으면 되는 거예요.  충분히, 나는 그럴만하다고 믿으니까.







내가 보기에 우린 모두


  

이게 필요해






  매튜 퀵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2012년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원제: Silver Linings playbook)은 전형적인 로맨스 코미디라기보단 실은 정서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의 '치유'에 관한 드라마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굉장히 전형적이죠.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하던 두 주인공이 어느새 사랑이 싹트고, 주변 인물들의 도움 속에서 모두가 결국 행복하게 손을 맞잡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두 남녀 주인공의 첫 등장들에서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아요.  이 둘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물들도 조금씩은 다 마찬가지.  이들 모두의 '정신 상태'들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거든요.  보기에 따라선 이게 대체 뭔 영화지 싶을 정도로 심각한 정서적 결함들을 보이는데... 그래서 내내 또 그게 현실적으로 와닿더란 말이죠.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영화 속 '미친' 인물들의 '미친' 짓들 속에서 묘하게 거울 속 제 모습이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아내의 외도와 그로 인한 폭행으로 인해 가정과 직장을 다 날려버린 남자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  한참을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돌아온 후 분노조절장애, 피해망상, 극심한 조울증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죠.  불의의 사고로 느닷없이 남편을 잃었던 여 주인공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어떤가요.  그 큰 충격과 상실감에 무너져 남편 회사의 동료들 모두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래서 '걸레'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둘은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상대에게 악다구니와 쌍욕들을 퍼붓죠.

  

  이 구역, 아니 이 작품 속 가장 '비정상'인 캐릭터는 단연 이 두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딘가 모를 '마음의 병'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사는 건 이들만이 아닌 거 같아요.  아들을 걱정스레 지켜보는 아버지도, 펫을 도우려 애쓰는 단짝 친구도 어딘가 측은한 구석들이 보입니다.  완벽한 결혼생횔속에 있는듯한 티파니의 언니도 그러하고,  심지어 두세 장면 슬쩍 출연하는듯한 주변 인물들까지도 채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의 병과 스트레스를 모두 안고 있죠.  편집증, 강박증, 집착,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의 공황장애에 이르기까지.

슬쩍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들이 겹쳐 보이더군요.  강한 척, 다 괜찮은 척 보이려 애쓰지만 실은 건드리면 툭하고 무너져버릴 거 같은 영화 밖 현실 속 수많은 캐릭터들.  그들의 '미친'짓들과 그에 버금갔을 나의 '미친' 짓들까지... 모두 다 스르륵 눈앞에 스쳐 갑니다.










  






  샤방샤방 빛나는 주인공들이 꿀 떨어지는 스파크들을 한두 번 정도 튀겨줘야 할 법한 로맨스 무비인데도,  얼핏 메마르고 건조한 사이코 드라마 같은 영화의 전반부는 살짝 당혹스럽기까지 하죠.   제각각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시시각각 신경 안정제를 들이켜야 하는 두 남녀의 만남 이후 그림들도 그리 고상하진 못합니다.  검정 비닐 봉다리를 뒤집어쓴 남자 팻과, 역시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마주 선 여자 티파니가 백주 대낮 길거리서 '니가 더 싸이코야'라며 독설을 퍼붓는 장면들에선 그놈의 로맨스 따위, 뭔 개뿔.  당장 총이라도 들고 나와서 상대 머리에다 방아쇠를 당겨도 이상할 것 없는 살벌한 분위기죠.  우여곡절 끝의 그 첫 데이트마저  '난 돌았어도 너랑 동급은 아니야'라며 상대를 개무시하는 팻의 뻘짓으로 시작해,  열 받은 티파니가 날리는 통렬한 가운뎃손가락 쌍욕으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도대체 로맨스 무비 맞는 거냐고.


  하지만 신기하게도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첨엔 정 붙이기도 힘들었던 이 두 또라이 남녀에게 마음이 점점 기울어질 겁니다.  안쓰럽고, 연민을 넘어선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서서히 들기도 하죠.  이 작품이 이렇게 점점 '이뻐' 보이는 건, 무엇보다 두 주인공 역할을 각각 맡았던 브래들리 쿠퍼와 제니퍼 로렌스의 지분이 커요.  말 그대로 '미친' 연기가 정말 '미쳤었죠'.  특히 촬영 당시 21세였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극단을 오가는 정신적 피폐함과 복잡한 감정 기복들을 능청스럽게 연기했던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한마디로 이 작품의 백미였습니다.  이 배역 연기 하나만으로 제85회 아카데미에선 최연소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70회 골든글로브, 제19회 미국 배우 조합상, 제18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거기다 제22회 MTV 영화제 모두를 통틀어 여우주연상 부문을 혼자 독식했었으니까요.  


  물론 작품 자체만으로도 평론과 흥행 모두에 있어 그 무게감이 만만찮았습니다.  아카데미에선 은근히 외면받는 장르인 로맨틱 코미디였음에도 핵심 부문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포함 모든 연기 부문까지  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기현상'을 낳았던 작품이기도 했죠.  사골 같은 영화입니다.  처음 볼 때보다 두 번 세 번째 볼 때 더 인상 깊었어요.  전형적인 대사와 연기들로도 보이지만, 왠지 곱씹어 볼수록 감칠맛이 우러날 겁니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이 찐득한 관계들의 시큼텁텁한 그 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






  '고진감래'에 가장 가까운 영작 표현중 하나라고 알려진 유명한 영어 속담이죠.  매튜 퀵의 원작 소설과 이 영화의 제목 양쪽 다 왜 이 아리송한 표현이 붙은 건지는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모든 구름들의 가장자리엔 그러니까 빛나는 저 은색 라인들이 있다고?  시커멓게 찌푸린 먹구름 뒤엔, 다만 가려졌다 뿐이지 늘 그곳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들이 가득하다는거겠죠.  그러니 지랄 같은 날씨들이 이어져도 실은 우리 머리 위엔 찬란한 저 태양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하듯이,  먹구름 같은 썩소로 매일 마주하는 저 싸이코들에게도 선비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inner peace를 외치면 모든 게 해피엔딩일 거란 그 희망고문을 의미하는 건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만나자마자 '미친놈, 미친년'이라 서로 물어뜯어대던 이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아가는 과정들은 전형적이지 않아서 분명히 꽤 흥미롭습니다.  아닌 척하지 않아요.  내가 '아프다'는걸 알고 있고, 그걸 굳이 포장하거나 미화하려 애쓰지 않죠.  정서적 결함을 가진 두 사람이 그 상처를 드러내고 까뒤집어가며 그러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가식적인 사탕발림보다는 당혹스러운 그 솔직함들이 더 현실적인 공감으로 와닿아요.  난 지극히 정상이고, 이 구역의 미친 자는 오로지 너뿐이야 라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고깝게만 대하고 있는 거라면... 그런 나 자신도 영화 속 팻이나 티파니와 그다지 다른 모습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나의 자뻑으로 누군가의 결함을 애써 후벼 파려 하지 말고, 반대로 나의 결함을 다른 누군가의 결함들과 때론 등가교환하며 시크한 척 흘려버리며 살기.


  쉿, 다시 한번 솔직히 말하자면 말입니다.  

사실 우린 모두 다, 아파요.  

그러니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예의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며 이렇게 미소 띠며 말해주고 싶어 집니다.  

우리 모두의 이 '미친 짓'들을,  기꺼이 사하겠노라고.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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