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도 아빠도 머리맡에 꼭 물을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다 일어나는 일은 화장실 갈 때 뿐이었던 어린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다가 목이 마른다고? 그래, 그렇다고 해도 일어나서 마시면 되잖아. 손 닿는 곳에 두려는 건 할머니랑 아빠가 좀 게으른 것 같은데.
아침에 들여다보면 컵 속의 물은 한모금 정도 줄어있거나 그대로였다. 해가 뜨면 그대로 버려지는 물도, 그 행위에 들이는 공도 아까웠지만 그저 습관이려니 했다. 습관이라는 건 원래 바꾸기 어려운 거니까. 나름 배포 있게 이해력을 발휘한 어린이였다.
마흔셋이 된 봄. 나는 마침내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의 꼬리가 아직은 날름거리는 밤, 약간의 난방을 틀고 여느때와 같은 봄 맞이를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내 목은 여느때와 다르게 봄을 맞이했다. 콜록콜록. 매캐한 목의 감각을 느끼며 수시로 잠에서 깼다. 건조한가 싶어 젖은 수건을 머리맡에 두고 자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삼일에 한번은 꼭 기침 때문에 잠을 설쳤다. 입면이 쉽지 않은 자에게는 재난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몇번의 기침을 뱉어내고 얼른 돌아눕더라도 칼칼한 목의 감각이 심히 거슬려 결국 부엌으로 가 물을 한모금 삼켜야 했다. 그러고 나면 잠이 새어나가 한동안 뒤척이다 날이 새고 만다.
그러다보니 이제 내 머리맡에는 물 한잔이 놓여있다. 오늘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곧 찾아오고야 말 기침을 얼른 잠재우고 새어나가려는 잠을 붙들기 위해서 말이다.
통상 ‘자리끼’는 배고픈 시절, 허기를 달래기 위해 잠자리에 두는 끼니라 해석되지만 내게 ‘자리끼’는 잠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기침을 달래기 위한 젯밥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