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삼 Dec 29. 2021

공에 대한 기억

한 글자 에세이 - 구(球)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도 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농구를 하기도 했다.
구기 종목에 취약했던 나는 공에 발이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공을 쫓아다녔다. 남동생이 잠시 중학교 야구부에 속해 있었을 때는 남동생과 자주 캐치볼을 했었는데, 그때 조금 더 재미를 붙였다면 지금 구기 종목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허휘수.


이 대목을 읽고 공에 관한 기억을 되짚어본다. 나에게 있어 ‘공’은 두려움과 폭력의 물체였다. 처음부터 공을 무서워한 것은 아니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한 친구들과 학원에 가기 전에 축구를 하기도 했다. 당시 운동장에는 골대조차 없었기에 네가 찬 공과 내가 찬 공을 죽어라 쫓아다니는 꼴이었지만,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심장 터질 듯이 뛰어다닌 경험은 ‘힘들지만 더 빨리 달리고 싶다, 더 정확하게 공을 넘겨주고 싶다’로 자라났다. 명절 때 친척들과 만나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다가 너무 힘껏 찬 나머지 강물로 떠내려가 버린 공들도 떠오른다. 그러다 피구 시합과 중학교 등굣길 시간을 거치며 공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다.


초등학생 때와 달리 중학교 운동장은 축구 골대가 있었다. 등교 길목에.

학교 정문 앞 삼엄한 선도부의 시선을 뚫고 걸으면 오른 편에 골대가 있었다. 아침부터 축구하는 남자아이들은 주의를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골대를 향해 공을 날렸다. 골이 들어가면 다행이었다. 엇나간 공은 등굣길 외벽을 때렸고 등교하는 학생들은 항상 등굣길에 축구공에 맞을까 노심초사하며 3년을 보내며 공에 맞아 양호실에 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피구란 가만히 있는 공을 차가며 골문을 향해 뛰어가는 축구와 달리 사람을 공으로 때려야만 승리하는 비인륜적인 스포츠다. 남자아이들은 공을 잘 받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을 먼저 표적으로 삼았다. 차라리 빨리 공에 맞아서 죽고 싶었다. 요리조리 피하며 버티다가는 닭장 안에 토끼 같은 행색으로 모두의 시선을 받을 터기에.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공을 받으려 하다 놓치면 "차라리 피하지 그걸 왜 받으려 하냐"는 야유와 손가락 골절이 함께 했고, 공을 피해 끝까지 살아남으면 늘어지는 경기에 "언제까지 피할 거냐" 비난을 받는다. 결국 최대한 빨리, 친한 친구에게서 던져진 덜 아픈 공격을 받아 죽는 선택이 최선이었다. 피구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폭력의 장이었다.


운동장이 싫었고 공이 싫었고 운동이 싫었다. 빠르게 날라오는 공은 나보다 커 보였고 청쾌했던 공 소리는 공포가 되었다. 그 공포를 몰고 다니던 아이들의 체육복에 배인 냄새는 더 싫었다. 몸통을 맞출 수도 있었으면서 따돌림당하는 아이의 얼굴을 맞추고서 킬킬거리는 폭력의 추악함과 이에 침묵하는 공기 속에서 분노와 저항의 준엄함은 절멸되었다.


중학교 시절 유일하게 발야구 수행평가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평가 항목은 간단했다. 타자가 공을 받지 못하게 멀리 공을 날려보낼 것. 쉬는 시간, 자율 시간, 운동장을 점유해본 적 없는 여자아이들은 손으로 하는 구기 종목보다 발로하는 구기 종목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은 차는 족족 땅볼이었고, 타자는 굴러오는 공을 쉽게 받아냈다. 내 차례가 되자 남자아이는 땅볼로 굴러들어올 공을 예상한다는 듯이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힌 채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렸다. 오른발을 맞고 튀어 오른 공은 그의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여유롭게 수행평가를 끝냈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운동을 싫어하며 살아갈 것 같았던 나에게 여고에서 겨룬 피구는 같은 구기 시합임에도 전혀 다른 경험이 되었다. 체육대회가 되면 댄스부 언니와 짧은 머리에 운동 잘하는 동급생은 최고의 인기스타다. 그 짧은 머리에 운동 잘하는 동급생이 같은 반이라면 마치 필드 위의 김연경처럼 존재만으로도 자신감을 끌어올려 주는 친구가 된다.


중학교 시절과 달라진 게 있다면 단연 필드 위 남성의 부재이다. 식당과 강당으로 가는 통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 교실이 있었기에 종이 울리자마자 점심을 먹고 강당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갔다. 운동장의 자동차가 파손될 위험이 있어 공은 빌려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드민턴을 쳤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왠지 모를 긴장감과 함께 라켓을 쳐올리면 네트 끝자락에 걸려 싱거운 모양새로 떨어지는 셔틀콕에 뒹굴며 웃고, 끝나지 않는 랠리에 환희의 고성을 내질렀다.


보편자, 시선의 권력자, 시도의 약탈자, 고취된 자 없이. 주변자, 시선에 경유된 자, 시도의 박탈자, 성원자 없이 수직도 수평도 시선도 없이. 열과 땀과 호흡만 존재하는 유동성.


체육대회 시즌이 되자 반마다 단체 티는 어떤 걸로 맞출지, 이어달리기는 누가 나갈 것인지에 대한 아우성 속에 피구 시합 대진표가 걸렸다. 두려움은 나뿐만이 아닌지 다들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린 채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반 대항 연습 경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큰 키에 강스파이크를 휘두르던 A는 맹렬히 분노하며 석식 시간 전에 연습 시간과 특별 지도를 자처했다.


구기 종목은 공에서 공으로 이어가는 흐름의 연속이다. 홈에서 홈으로 달려나가는 야구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지구다. 직선에서 유배된 자는 둥지를 떠돈다. 육체의 역동성이 넘실거리는 축구와 배구에서 인간의 관계는 블라인드 테스트다. 공이 묻고 몸짓으로 답하는 절차에 폭력은 없다.


A는 공을 잡는 자세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손으로 잡지 못하면 가슴팍과 손목을 이용했고 잡지 못하면 공을 응시하며 도망가도록 했다. 강하게 던지지 못하는 친구는 정확한 토스를 익혔다. 공에 익숙해질수록 고조되는 관계의 상실성과 회복력은 남녀공학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기쁨이었다. 내던지고 고함치고 욕하고 부딪치고 괜찮다 말하고 넘어지고 일으키고 일어나는 행위 속에서 모두의 시선은 공에 반짝인다.


실력자와 풋내기로만 가득 찬 시합에서 풋내기를 담당한 나는 공을 받아내고 무릎을 바쳤다. 페스츄리처럼 까진 무릎의 아픔보다 끝까지 공을 받아냈다는 짜릿함에 기뻐하며 수비수에게 공을 넘겼지만 경기는 패배로 끝났다. 경기가 끝나자 풋내기들은 점심시간과 석식 시간을 바쳐 연습한 기억과 이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울며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러댔다. A는 심상한 눈으로 지켜보다 눙치며 함께 빙글빙글 돌았다.



모든 약자가 박탈 없이 너른 땅 위에 자신의 몸만 감각할 수 있기를.


21.05.25.


작가의 이전글 어른이 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