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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드 Jun 26. 2020

서른 번의 바다가 얼고 녹았다

목요일 저녁 일곱 시 반


내 마음은 바다요, 그대 함부로 노 저어 오지 마오. 얼음 조각에 노 여기저기 긁히고 패이거나, 급류에 휩쓸릴 수도 있다오. 잔잔해 보이는 물 밑에는 발 닿지 않는 깊은 어둠이, 시선조차 가 닿지 못하는 까마득한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오.






언제든 결국은 이 글을 쓰리라 생각했다. 나는 항상 깊은 물 속을 떠올린다. 한 번도 마음 속 바다를 잊어본 적 없다. 어릴 때는 남들보다 항상 반 발자국, 적어도 한 발자국 앞서 달리고 있다는 오만함이 나를 지배했다. 반에서 가장 먼저 대학에 합격했고, 가장 먼저 운전면허를 땄고,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취업에 성공했다. 그런데 인생은 ‘그리고 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막연한 꿈이었고, 당장 안정된 직장이 급했기에 무조건 취업을 했다. 


스쿠버다이빙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겉보기에 아무리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도, 1미터만 물 밑으로 내려가면 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신입사원 시절은 참아내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준비 없이 물 속으로 뛰어든 내게, 일과 사람은 모두 귀가 찢어질 듯한 지옥이었다. 일은 보람없이 힘들기만 했고, 말 그대로 또라이 직속 상사는 첫 사회생활의 강력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는 나를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괴롭혔고, 바쁜 일 없을 때도 매일 앉아있는 눈치 야근이 10시까지 계속되었다. 아무 말 못 하던 내가 단 한 번 퇴근하겠다고 대들었을 때, 그는 집에 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 시간을 더 훈계하는 인간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도착하면, 그가 미친 건지 내가 미쳐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회사가 싫어서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밖을 나가면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규칙적인 수입이 없는 삶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회사를 때려치우는 대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돈에 집착하게 되었다. 돈을 잃을까 봐 무섭다. 집이 망해서 온 가족이 보증금 600만원도 안 되는 원룸에 살까 무섭다. 아는 사장님에게 덥석 보증을 섰다가 사기를 당할까 무섭다. 아빠처럼 살기 싫다. 아니, 그런 아빠랑 사는 엄마처럼 살기 싫다. 항상 돈돈돈 입에 달고 살며 남편에 대한 미움을 자식들에게 푸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혼자 먹고 살 정도는 벌어야 한다. 나이가 들었을 때 의지할 곳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돈 벌기 위해 참고 참고 참아내며 회사를 다녔고, 또라이 상사가 다른 팀으로 떠났고, 나도 업무가 바뀌었고, 이 회사에서는 한 번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좋은 동료들도 만났다.  


잔잔한 바다는 이제 멈춘 것처럼 보인다. 먹고 사는 일은 매일이 똑같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매년 얼고 녹고 한 살씩 먹었다.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은 벌써 두세 번은 이직을 하거나 해외로 이주했고,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았다. 가끔 나는 우리가 한 직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나는 여전히, 7년째 소름끼치도록 똑같은 출근길을 눈 비비며 걷는다.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시간에 퇴근해 잠든다. 바닷물이 고여 딱딱하게 얼어버린 것 같다. 이제 모두가 나보다 앞서 나가더니 수평선 너머 점만큼 멀어졌다. 항상 한 발자국 앞의 목표만 정하고 달리던 나는 어느 순간 노를 놓쳐버리고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깊은 바닷속은 이 곳이 물 속인지 물 밖인지조차 모르게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수온이 조금씩 높아지지만 다들 뜨거운 줄도 모른다. 차라리 나도 따뜻한 물 속에서 안온감을 느끼는 미련퉁이였으면 좋으련만. 초점 없는 눈동자로 모니터만 바라보는 죽은 물고기들 가운데서 비린내를 겨우 참고 매일 출근했다. 먹고 살려고 회사를 다니는 건지, 회사를 다녀서 먹고 사는건지. 한 회사에 입사해 서른이 넘으니 신입사원 혹은 입사 초년생 직원들이 대단하다며 물어온다. 


“어떻게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니셨어요?”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는 채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대답하기 싫다. 회사에 대해 아무런 기대와 애정이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어. 그냥 돈 벌려고 다니는 거야. 돈을 많이 벌어야 나중에 글 쓴답시고 백수가 되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잖아?






나는 어두운 물 밑에서 손발을 움직여 본다. 검고 끈끈한 물이 온몸을 휘감는다. 전신에 달라붙어 떨쳐낼 수 없는 축축하고 묵직한 무언가. 그건 먹고 사는 현실이다. 7년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변함없이 다른 곳에 있었지만, 나는 티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제 바다가 아니라 주전자에 담긴 작고 옹졸한 마음은 펄펄 끓고 흘러 넘쳐서 다 졸아드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혼자만 하는 하루의 전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나는 아주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대로는 내가 죽을 것 같아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북클럽에 나가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참았던 숨을 조금씩 흘려 보내며 잊었던 기억들을 불러왔다. 글을 쓰며 두근대던 순간, 그 몰입의 기쁨이 되살아나자 나는 조금 편안해졌다. 물 속에서 뒤채이던 두 다리로 물살을 헤치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내뱉는다. 답답하게 고여서 끓어대던 호흡들이 폐를 밀고 올라와 입 밖으로 팍, 하고 터진다. 어차피 아가미로 숨을 쉴 수 없다면, 죽어가는 입으로 뻐끔대기 전에 남은 생애를 다 걸어서라도 헤엄쳐야 한다. 덩굴처럼 얽혀서 얼어붙은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숨을 내쉬면서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발목을 단단히 옭아매고 움켜쥔 온갖 바다식물들을 뿌리쳐야 한다. 


호흡의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다. 단 한 번의 큰 호흡을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파도가 크게 일렁인다. 살아있되 죽어있는 그런 기분은 이제 충분하다. 생각해야 한다. 뭐라도 생각해내야 한다. 읽고 쓰고 행동해야 한다. 가슴에 치는 파도는 매해 얼고 녹으며 나를 자라게 한다. 바다가 다음 녹는점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숨을 터뜨릴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목요일 저녁 일곱 시 반> 4th, '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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