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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군 Feb 22. 2023

대책 있는 낙관주의자의 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긍정적 힘

작년 어느 날, 스티븐 핑커의 『지금 다시 계몽』을 읽다가 인간의 삶이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메시지를 찾고 감동을 받아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다"라는 주장을 구체적으로 풀어낸 책을 읽었고 그 내용에 감동했다고. 이 상큼한 기분을 친구와 나누려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톡의 마침표가 찍히자마자 친구는 즉시 화를 냈다. 그 말은 대책 없는 낙관주의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바로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옮겼다.


친구는 그 뒤에도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라는 말에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저 평가가 어떤 뉘앙스인지 손에 잡히듯 실감이 났다. 저 문장에는 세상을 비판의식 없이 살고 사회 부조리에 눈을 감는다는 함의가 들어 있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들은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어린이 등 약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 많은 사람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얼마나 착취하는지 모른다. 지구 온난화, 에너지 고갈, 쓰레기 처리, 동물 멸종 들이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인생을 영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세상을 개선할 책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자들이다.


카톡창을 다시 보자 내 눈에도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의 이미지가 비쳤다. 대학 시절부터 갖추었던 저항감과 분노도 느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세상이 더 좋아지고 있다는 말은 도덕적 하자가 있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대로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고? 저렇게 바깥에는 온갖 차별과 폭력과 부조리가 난무하고 있는데? 약자가 탄압받고 있고 세상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더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나? 여기까지 생각이 흐르며 내 죄책감이 불을 질렀다. 모두가 각성하고 더 싸워서 인류의 삶을 좋은 쪽으로 바꾸려면 아무렴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위기감을 자극해서 행동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긍정적 변화를 촉진한다는 생각은 너무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지인들을 떠올리며 이 이론을 점검해 보자 별로 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 시절에 세상의 부정적 측면을 잘 꿰뚫어 보던 냉철한 친구들은 냉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에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모순투성이인 현재에 지쳐 주저앉았다. 오히려 내가 약간의 의협심이라도 보이면 그냥 자기 인생이나 챙기는 게 순리라며 짐짓 철든 듯한 태도를 보였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90년대, 2000년대는 모두가 아기자기하게 잘 살았고, 그 뒤로 개혁의 바람이 불어 세상을 이리저리 바꾸려고 노력하다가 더 나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고, 여성과 남성이 이렇게 극한으로 싸우지도 않았으며,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중독 같은 병리적 현상도 없었다고 말이다. 역시 인생을 살아보니 보수가 맞다는 이 친구들의 말은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 약자들을 보호할 명목으로 만든 정책들을 폐기하고 예산을 삭감하는 전대미문의 정치도 이러한 의견에서 비롯한 듯했다.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더 좋아지고 있었다. 덩치가 작고 몸이 약했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학교가 맞으러 가는 곳이 되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손쓸 방법이 없어서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지 하며 지냈다. 지금은 학교폭력법도 만들어졌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일이라는 인식도 생겨서 다행감을 느낀다. 그때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소수자들이 지금은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읽을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으며, 과거 도트그래픽 수준이었던 컴퓨터게임이 이제는 영화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한스 로슬링의『팩트풀니스』와 스티븐 핑커의『지금 다시 계몽』은 이러한 사실들을 수없이 많은 통계자료로 논증하는 책이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공중보건의 개선, 평균수명의 증가, 여권 신장, 소수자 차별 철폐, 국민소득 상승, 문화예술의 풍요라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책을 마주하던 초반엔 지금 생각하면 뻔한 이 증거들에 너무 놀라서 이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역시 과학적 이유라기보단 도덕적 이유에서였다.


친구의 분노를 곱씹고 생각을 정리하자 위의 저자들이 내놓은 증거보다 더 당연한 진리가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염원하고 노력하니 인류의 삶이 나아지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낙관주의자들에겐 대책이 있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을 더 안락하게 하고, 인권 문제를 공론화해 차별을 없애고, 각자가 창의성을 발휘해 모두가 향유할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방법이었다. 이 단순 명료한 인과관계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다시 친구에게 연락할 기회가 되면 말하고 싶다. 나도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독서를 통해 대책 있는 낙관주의자가 되었다고. 분명히 존재하는 긍정적 변화들을 죄책감 때문에 외면하는 사상이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며 세상을 퇴행시키고 있다고.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성과들을 충분히 즐기고, 다시 움직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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