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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군 Jul 05. 2023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말

이 말에서 비롯한 상담에 관한 고찰

사실 상담하는 사람들은 예민하다. 밖에서 별로 티내는 상담자들은 별로 없지만, 우리끼리는 그렇다. 이 분야의 특수성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대인관계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 이해의 전문가가 되어 간다고 느낀다. 자신감이 특히 충만한 분들은 인생사를 통해 심리학을 충분히 익혔다고 여긴다. 물리학이나 인류학, 간호학은 책을 읽고 수업을 들으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분야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상담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은 나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연륜이 학문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4년 혹은 6년이나 9년을 대학에서 밤을 새워가며 한 고생이 그냥 현실을 잘 모르는 책벌레들의 무의미한 시간낭비로 취급되고 나면 상처를 받는다. 침해받기 쉬운 전문분야를 선택한 사람들이니 누군가 상담에 관해 한마디 거들려고 하면 일단 가시부터 세우게 되는 것이다.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 아냐?"라는 이러한 상처를 잘 건드리는 말이다. 이 문장은 한국말이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가지 뉘앙스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예상되는 의미는 "상담은 내담자가 무슨 말을 하면 박자맞춰 끄덕이고 추임새만 넣으면 되는 별 것 아닌 일 아니야?"이다. 두번째로 예상하는 의미는 좀 심오하다. "상담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인내를 가지고 참으며 들어내야 하는 거룩한 일 아니야?"라는 거다. 실제로 봉사정신 많은 분들이 상담을 이렇게 이해하여 이 분야에 지원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든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은 나로서는 항변하고 싶은 말이다. 상담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교에서 수백쪽에 달하는 골치아픈 분야 - 내담자 분석을 위한 성격심리학, 자극과 반응간의 관계를 배우는 학습심리학, 당연히 상담 이론과 기법, 정신질환을 다룬 이상심리학, 과학자 모델에 따라 인간을 정량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심리통계,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객관적인 진단을 하기 위한 심리검사,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을 배워야 하는 생리심리학 - 을 이수하고 한 회기 A4 수 쪽에 달하는 분량의 축어록을 말 한마디 한마디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해명하고 혼나는 수퍼비전 과정을 거쳐 이 자격을 얻었노라고 말이다.


그런데 머리 식히고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내가 이 분야에 지원했던 것도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롬바인』에서 콜롬바인 총기사건 피해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냐는 질문에 마릴린 맨슨이 자신은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게 아니라 들어 주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정말 감동이었다. 예전에도 고민 상담은 있었지만 주로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 문제에 맞는 교훈을 전달하는게 상담이었다. 들어주는 사람의 자세는 겸손했고 진중하다. 이에 따르면 상담은 자신의 시간과 힘을 내어주는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주는 선행이다. 심지어는 어린 나에게 인생은 이렇고 저런 것이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어른들에게 한방 먹이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문장을 주고 내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보라고 하면 "충고와 판단을 내려놓으며 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이 분야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내가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측면이라서 더욱 그렇다. 특별히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충고와 판단을 더 잘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는 배워야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애인에게 돌아가는지', '이 기분에서 하루 빨리 도망가고 싶다는 사람이 이 좋은 날씨에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뭔지', '파산해서 빚쟁이가 된 사람이 왜 자신을 그렇게 만든 카지노로 향하는지' 얼른 야단치고 싶은 너무 많은 사례들 앞에서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절절히' 느끼기 위해선 배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니까.


심리상담의 원리들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많이 스며들었다. 특히 다른 사람과 잘 지내려면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라는 조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옛날보다는 낫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여전히 실천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오래 살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이를 지혜로 만들기보다는 확증편향에 빠져 그 분야를 수 년 연구했던 상담자들에게 참견하는 사례만 자주 눈에 띈다. 이런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혹시 자기주장을 못해 본인 몫을 뺏갈까 듣기를 포기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들도 많다. 이런 세상에서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줘도, 그리고 그런 태도만 실천해 줘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더 이상 이 말이 그렇게 기분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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