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다시 말해 놀이의 거의 모든 것
다음의 놀이 도구를 우리는 무엇이라 칭하는가?
- 컵 안에 볼링핀같이 미끄러운 플라스틱 조각들을 열 다섯개 넣고 이를 손목 스냅으로 한번에 쏟아 바닥에 떨어진 조각의 개수 위치에 해당하는 보너스(돈)을 받아 부자가 되면 이기는 게임.
- 테트리스 조각과 같은 도형이 혹이 있고 굽어 3차원 공간으로 뻗어있으며 이 도형 3~4개를 합쳐 정해진 모형의 공간도형을 남들보다 빨리 만들어야 함.
- 가로 세개, 세로 일곱개의 총 21개의 단어를 제시하고 그 단어의 좌표를 각 플레이어에게 부여하여 최대한 빨리 이를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의 그림이 무엇인지 경쟁자보다 먼저 맞추어야 하는 게임.
- 손에 있는 카드를 차례에 한 장씩 내는데 가장 먼저 다 낸 사람이 이기는 게임. 사람들은 자기 손의 카드를 빨리 털기 위해서 소매에 숨기거나, 책상 밑으로 떨어트리거나, 다른 카드 아래에 깔아도 됨. 단, 걸리지만 않는다면.
- 각 플레이어들은 유명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고흐나 뭉크와 같은 전설적인 미술가들의 그림을 경매로 팔게 됨. 그냥 가격을 제시하는 자유경매부터 자신이 낼 금액을 손 안에 숨겨 동시에 펴는 주먹경매까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음. 내가 소지한 작품이 다수가 되도록 치밀한 판촉작업을 해야 함.
- 중세 유럽의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게임. 주어진 일꾼들을 이용해 나무를 베고, 점토를 채굴하여 울타리와 가마를 만들고 밭을 일궈 밀과 호박을 재배하며 양과 소를 키우면서 내 농장을 가장 부유한 곳으로 만들어야 함.
- 화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으로 바꾸는 테라포밍(terraforming) 작업을 담당하는 기업이 되어 각 회사만의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온도를 높이고 산소를 생산하고 물을 확보하는 일들을 하게 됨. 돈은 물론 강철, 티타늄, 열, 전기와 같은 자원들을 다른 기업보다 더 빨리 많이 획득하여 조금이라도 화성 개발에 더 많이 기여해야 승리할 수 있음.
이 형식도, 플레이 방법도, 무게감도, 쓰는 뇌도 다른 게임들을 우리는 모두 '보드게임'으로 묶어 부른다. (해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서, 게임명은 위에서부터 흔들어봐 헬프요정, 우봉고 3D, 픽토매니아, 사기꾼 나방, 모던 아트, 아그리콜라, 테라포밍 마스이다.) 그림을 그리고, 창의적인 힌트를 만들고, 물건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고, 숨겨진 정보에 의존하여 주식투자를 하고, 경매와 거래를 하고, 카드와 일꾼 말을 사용하여 자원을 관리하고 승점을 획득하는 이질적인 장르의 놀이들이 모두 같은 범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보드게임 커뮤니티인 보드게임긱(boardgame geek)에는 10만 종이 넘는 보드게임이 등록되어 있다.
나는 취미생활을 찾는 사람들에게 늘 보드게임을 추천한다. 보드게임은 실패할 수가 없다. 심리전에 능한 사람은 경매나 블러핑(bluffing:거짓말)게임을 좋아할 것이다. 가족오락관이나 1박 2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제약 안에서 힌트를 주고받는 그림그리기 게임을 선호할 것이다. 치밀한 수싸움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테마나 그림 없이 규칙대로만 겨루는 추상전략을 찾을 것이다. 취향별로 그 사람을 만족시킬 게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드게임은 무조건 재미있다.
가장 인기가 좋은 보드게임은 조금 복잡하고 다음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일꾼이라는 미플(목재로 만든 인간 모양의 말)을 커다란 보드판의 정해진 일터에 배치하거나 카드를 내서 카드에 적힌 행동을 시행한다. 자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는 돈이나 목재, 고기, 옷감 같은 것으로 위의 행동으로 모을 수 있다. 자원은 건물을 짓거나 시설을 개선하는데 사용하고, 교환이나 가공을 하여 더 고급 자원으로 바꿀 수도 있다. 건물이나 시설이 확보되면 기존의 행동이 업그레이드 되는데, 이는 같은 비용으로 더 많은 효과를 본다는 뜻이다. 이를 보드게임 용어로 엔진이라고 하며 이를 갖출수록 발전속도가 더 빨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승점확보 속도는 차례의 횟수를 X축으로 할 때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
어려워 보이지만 규칙은 중학생 정도면 곧잘 익힐 수 있다. 해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고 세 수, 네 수의 앞을 보면서 청사진을 그려나가야 하기 때문에 경영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카드 뽑기나 주사위 던지기의 요소가 있는 경우가 많아 운이 약간 섞여 있으며 꼭 잘하는 사람만 이기는 것은 아니다. 연습효과와 순발력이 승패를 결정하는 컴퓨터 게임과는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보면서 할 수 있고, 대화를 하면서 협상과 조율이 가능하며, 초보자는 순간순간 가르쳐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게임이지만 오히려 상호작용이 촉진된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근데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보드게임은 그 자체가 머리를 쓰는 연습이다. 턴제게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수계산이 논리력, 계획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매나 거래 장르에서는 협상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며 공동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협력게임에서는 공동체 역량이 발휘된다. 힌트를 주고받는 장르에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어휘나 공간지각, 민첩성을 쓰는 게임도 있다. 보드게임을 종류별로 즐기면 분야별 지능을 다 이용한다. 승부욕이 개입하기 때문에 동기도 충만하다. 놀면서 배운다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보드게임 할 때는 전자기기를 멀리하게 된다. 필자도 보드게임 할 때는 다섯시간씩 핸드폰을 안 본다. 보드게임은 스마트폰 중독을 예방하는 최고의 대치품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게임이고 재미도 있으니까, 독서나 운동과는 아무래도 결이 다르다. 보드게임은 대부분 자기 턴에 수를 두는 시스템이고 기다림을 훈련해야 하며 이기려면 깊이 집중해야 하므로 즉각적이고 가벼운 보상을 제공하는 온라인 게임과는 상극이다. 게다가, 그런 몰입 상태가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이점도 있다.
가족끼리 할 수 있다. 보드게임은 대부분 3~4인이 최적이다. 사람대 사람의 관심이 주어지므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순발력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나이가 많아도 입문할 수 있다. 주사위 운이 승부를 가르는 보드게임은 누구나 한 번쯤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운동은 밖에 나가야 할 수 있지만 보드게임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탁자와 의자만 있으면 된다.
부루마불, 젠가, 할리갈리, 루미큐브만 알고 있었다면 당장 주변의 보드게임 카페에 가서 추천하는 게임을 즐겨 보자.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재미가 가득한 세계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