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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여행자 Jul 28. 2021

엄마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왜 엄마를 떠났나. 13


&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쓴 글입니다.



  괴물이 되고 싶었다. 평범하던 한 소년이 총기 난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쏴 죽였듯, 상상 속에서 그리고 꿈

속에서 나는 끔찍한 몰골의 괴물이 되어 아빠와 엄마를 집어

삼켰다.

 차마 그러지 못하는 현실의 나는 참고 참다가 엄마에게 똑같이 카톡으로 되갚아 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쳐서 누군 가를 해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우리 때문에 참고 살았다고? 뭘 참았는데.
화나면 소리 지르며 동네방네 떠나가라 울부짖고, 허구 헌날 '너희 먹이고 입히고 키워준' 타령하며 공치사
하고. 그것뿐이야?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 남의 가정사
죄다 끌어와서 늘어놓고. 도대체 우리가 왜 남의 이혼사
에 잠자리 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건데 왜?!
 툭하면 나쁜년들아 욕하고 너희들같이 못된것들 필
요없다고 하고. 또 뭐라고 했더라. 나가 죽어버리라고
도 했지. 꼴보기 싫으니까 죽으라고....

 난 막장 드라마 우습더라. 어느 집안 콩가루 집안이라
고 한 번씩 뒷담화하지? 엄마, 우리 집은 그럼 뭐야.
저번엔가는 유산이 어느 정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받으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지? 유산 때문에 효도
하는 자식들 봤겠지. 난 엄마 돈 십원 한 푼도 탐낸 적 없
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추호도 없어.

우리더러 출가외인이라며... 출가외인인 딸들한테 왜
바라는 건 많은 건데? 때 되면 명절이고 생일이고 우리가 형편만큼 챙겨드리는데도 불만이지. 우리는 늘 부모한테 걱정 끼치지 말고 여유롭게 잘 살아줬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언젠가 딸들이 문제 일으켜서 숟가락 얻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거 모를 줄 알아?

 엄마랑 아빠 부부싸움할 때마다 우리가 느낀 공포심과
무력감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지? 엄마는 아마 내가 죽어도 모를 거야.
 내가 죽어버려도 '그렇게 약해 빠져 가지고 가버려서 자식 앞세운 엄마 만든 불효자식 나쁜 년' 이라며 두고두고 날 원망하고 물어뜯을 사람이야.
 엄마는 내 죽음이 슬픈 것보다 '자살한 딸의 부모'라는 시선으로 볼 사람들의 눈이 싫겠지.
 언제나 내게, 여동생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부끄
럽다, 체면이 깎인다' 그놈에 체면이 자식들의 안위나
행복보다 중요한 사람들이 엄마랑 아빠니까.
기대를 버린 지 오래지만 기회는 남아있어. 제발 이제
우리한테 상처 그만 줘.
 내가 엄마랑 아빠를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제발 부탁이에요.

 엄마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엄마가 달라질

까?그건 아닌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애원했다. 제발 그만 싸우시라고. 싸우더라

도 우리에게는 불똥이 그만 튀길 바랐다. 부모님이 싸우면

중간에서 두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도 우리 몫이었다.


 " 아빠한테 가서 밥 드시라고 전해. "

 " 엄마한테 나다 온다고 해라. "

 " 네 아빠 왜 안 들어니? 전화 좀 해봐라. "

 " 엄마한테 공장에 일있으니 나오라고 말해라. "


 부부싸움 때마다 긴장으로 오그라드는 마음. 또 우리에게

불호령이 떨어질까, 이번에는 무슨 일로 트집잡힐까, 또

불똥이 튀겠지?불안감이 증폭될수록 증오심도 커져갔던

걸까.




 6년전, 유산후 3년만에 밝음이를 가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제왕절개를 하고 나니 무서운 후유증이 남았다.

 몇 달 동안 자면서 자세도 바꿀 수 없을만큼 온몸의 관절이 뒤틀려 있었다.

 "환자분, 목디스크가 있네요. 날개뼈 한쪽은 나와있고요. 골반도 한쪽이 틀어졌고, 발목 인대도 많이 희미한거 보이

죠?흠.. 원래 여자들이 애를 낳으면 몸을 버리긴 하는데

이건 너무...... "

 

 말끝을 흐리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이 한

번 낳았다고 몸이 이지경으로 망가지다니....

 내 건강과 아이를 바꿨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도수치료를 최소한 3개월은 꾸준히 받아야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시어머니는 괴팍한 시아버지에게 손발을

묶인 처지여서 도움을 요청하기 죄송스러웠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여도 마음 편하게 내 아이를 맡길수는 없었다.




 엄마는....  일단 오가는 거리가 멀었다. 몸 아픈 딸을 위해

약을 지어줬으니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비싼 돈 들여 약을 사줬는데 그것도 쉬운일은 아니지 하고.


 아이를 낳고 아픈 몸으로 밝음이를 챙겼다. 도수치료는

시어머니께 아기를 맡기고 몇 번 받았지만 여간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께 매번 분유 물온도 맞

추기, 아이 밥 먹이는 시간, 주의 사항 등을 설명드리고

편하게 도수치료나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잘 먹지 않는 예

민한 아이를 어머니께 맡기다니.... 그 와중에 발목 인대 때

문에 발톱까지 말썽을 부려서 항생제를 먹으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이 젖은 물려야 하는데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잠도 못자

서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식욕, 성욕,

배변욕을 포기하다시피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100일의 기적이 오기 전까지 나는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친정에서보다 힘든일이 더 이상 없을 

알았는데 육아는 또 다른 로움이었다.

 살아만 있으면 괜찮다. 3년만 내가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없다. 3년동안 엄마로서만 존재한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 육아를 견뎠지만 아프고 약한 몸은 내 굳은 의지를 우

습게 짓밟았다. 그때만큼은 간절히 엄마가 필요했지만 바랄

수도 없는 일이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엄마라면 이까짓거 다 하는거야. 죽지는 않을테니 괜찮아.

아픈 환자(나)가 거동 못하는 환자(아기)를 돌보는 격이었

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다 지나갈 일들이었다.




 과거의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첫 아이를 잃은 아픔도 육 의 힘듬도 모두 지나갔다. 현재의 내게는 사랑하는 여섯 배기 아들과 남편이 있으니 과거의 경험들은 기억으로 남았 다. 지금의 행복을 얻기 위한 발판이었다고 여긴다.

 

 물론 산후풍과 관절염이라는 가볍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지

내가 결정한 선택이었으니 후회는 없다. 내 아이는 나에

게 '엄마'라고 불릴 수 있는 기쁨과 영광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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