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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피커 Jun 16. 2020

쉼표

곰 같은 엄마와 곰국

어린 시절부터 먹고 싶은 음식은 어김없이 며칠 내로 밥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난 엄마랑 내가 텔레파시가 잘 통해서 내가 먹고 싶은 걸 엄마가 기가 막히게 맞춘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엄마는 좀처럼 사 오지 않던 꽈배기를 시장에서 사 오셨다.      


“웬 꽈배기야? 맛있겠다”

“너가 먹고 싶다며”


엄마는 걸레질을 하며 무심히 대답했다.

내가 언제 그랬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며칠 전 TV에 나온 꽈배기를 보며 '맛있겠다' 중얼거린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때는 엄마가 근처에 있는 줄 몰랐는데 어느 틈에 들었을까.

그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밥상 위에 있던 메뉴는 엄마의 텔레파시 능력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가며 흘렸던 말을 주워 담아 밥상에 차려냈던 것이다. 그것을 대학생이 되고서야 알았다. 난 눈치란 걸 일찌감치 저 세상에 보냈구나.


40대가 된 지금,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엄마의 텔레파시로 차려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계란말이, 감자볶음, 장조림, 오징어채 볶음, 두부조림 등등 소소한 반찬들이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입에 발린 소리는 절대 못 하는 츤데레 스타일이다. 말투도 성격도 묵직하다.

그저 음식을 만들어 가족에게 먹이는 것이 당신의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보람으로 여기는 분이다. 그러기에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 밥까지 다 주고 나서야 밥숟가락을 뜨는 엄마였다.  

시시때때로 부엌에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는 '아나~' 하며 무언가를 건네줬다. 누룽지, 옥수수, 감자, 빵, 하드 뭐든지 뚝딱 쪄내고 만들어 내손에 건네주던 츤데레 우리 엄마.

그렇게 ‘엄마의 사랑’을 먹고 컸다. 저 세상에 보낸 눈치도 그건 잘 안다.



지금은 엄마의 그 지상 최대의 과제를 상당 부분 내가 물려받았다. 엄마에게는 무심한 딸이 자식 앞에서는 텔레파시 한번 통해보겠다고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뭐를 해줘야 맛있게 먹을까 끼니때마다 전전긍긍한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입이 짧아서 먹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며칠 전 큰 아들이 뜬금없이 곰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뜻밖의 메뉴인지라 어느 유투버가 곰국 먹방을 했나 싶어 물었다. 그런데 큰 아들 말이 예전에 할머니가 해준 적이 있는데 맛있었단다.


3년 전, 첫째가 6살 때였다. 내가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하는 동안 엄마가 첫째를 돌봐주셨다. 입 짧고 비실거리는 아이에게 뭐라도 한 입 더 넣어주려고 종일 이것저것 해서 먹이셨을 거다. 그 성격 어디 가겠나.

다행히 손자한테 곰국이 먹혔나 보다. 너 어릴 때랑은 다르게 재하가 곰국을 참 잘 먹더라고 연신 웃으며 얘기하셨던 기억이 났다.



요즘은 곰국 끊이는 집이 거의 없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집집마다 곰국을 꽤 많이 끓였다. 특히나 우리 집은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고 내가 몸이 약해서 곰국을 늘 대놓고 끓여 먹었다. 난 고기를 싫어해서 곰국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 위에는 그놈의 곰국이 허구한 날 올려져 있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끼니때마다 조금씩 먹다 보니 인에 박여서 그런가 슬슬 곰국의 제 맛을 알아갔다.


엄마는 진하게 우려낸 뜨거운 곰국을 스뎅 그릇이 아닌 꼭 투박한 뚝배기에 담아준다. 그 위에 부드럽게 삶아내 쭉쭉 찢어 밑간 해놓은 사태도 넉넉히 올려 준다. 그러면 거기에 다진 마늘과 송송 썬 파를 듬뿍 넣고 소금 후추를 톡톡 친다. 그것들은 뜨거운 뚝배기 안에서 곰국의 뽀얀 국물과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만들어 낸다. 갓 지어 윤기 나는 밥을 크게 한술 만다. 밥알 사이사이 국물이 스며든 국밥 위에 잘 익은 섞박지를 올려 함께 먹어야 진짜 제 맛이 난다.


성인이 된 후에는 한 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곰국 한 그릇을 싹싹 비울 정도로 그 깊은 맛에 빠졌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도 오빠도 사회생활로 외식이 잦다 보니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곰국은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집에서 사라졌던 곰국이 손자를 위해 부활했던 거다.

'할머니가 해 준 곰국'이란 아들의 말과 함께 소환된 그 시절의 추억과 맛.

입안에 스르르 군침이 돌았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이유로 요즘은 시성비 좋은 레토르트 식품을 자주 식탁에 올렸다.

우리 아들에게 할머니의 곰국이 본능적으로 필요했던 걸까.

레토르트 사골국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엄마표 곰국. 오래 공들여야 하는 그 곰국을 엄마가 그랬듯 나도 아이들에게 직접 해 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는 곰국 같은 건 안 해 먹을 엄마에게도.



엄마표 곰국 끓이기

한우 사골과 양지, 사태를 사다가 여러 번 물을 갈아가며 꼬박 하루 동안을 핏물을 뺀다. 이 핏물 빼는 과정이 잘 돼야 잡내가 안 난다. 핏물 뺀 사골에 물을 살짝 붓고 초벌로 가볍게 끓인 후 초벌물은 버린다. 뼈를 씻어 물을 다시 적당히 붓고 불을 조절해가며 8시간 동안 끓인다. 핏물 뺀 양지와 사태는 사골국물에 한 시간 정도 끓인 후 건져낸다. 건져낸 고기는 결대로 쭉쭉 찢어 소금 후추 간을 해놓는다. 푹 끓인 사골 국물을 식히고 나면 위에 하얀 기름이 생기는데 이걸 걷어내야 누린 맛이 없어지고 맛이 깔끔해진다. 그리고는 다시 끓이고 또 식혀서 걷어내고를 몇 차례 반복...



5g 시대에 꼬박 이틀이 걸렸다.

곰국은 특별한 기술보다는 인내와 정성이 필요한 음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닮았다.

이런 걸 허구한 날 해대다니. 곰 같은 엄마.


그렇게 영혼까지 갈아 넣은 곰국은 남편 말처럼 사 먹는 조미료 맛 곰국 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었다.

아이들은 둘 다 사내애들이라 그런가 국물도 고기도 제법 잘 먹었다.

모를 것 같지만 아이들은 안다. 이틀 동안 끓여낸 곰국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눈과 입에 각인되어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맛을... 그 사랑을...


곰국을 끓이는 동안, 엄마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1980년대 초반에 지어졌던 우리 집은 부엌 위쪽에 안방에서 연결된 다락이 있었다. 그 다락의 공간을 위해서 부엌은 마루보다 1m 정도 푹 꺼져 있었다. 그 시절에도 대부분 부엌 바닥은 장판이었는데, 우리 집 부엌은 타일 바닥이었기 때문에 부엌에선 꼭 '쓰레빠'를 신어야 했다.

파란 고무 쓰레빠와 푹 꺼진 부엌. 거기서 늘 무언가를 씻고 썰고 끓이느라 푹 꺼진 엄마의 뒷모습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내 눈에 각인되었다.

그 뒷모습은 학교에서 힘든 날에는 위로가 되어 주었고, 배고픈 날에는 기대가, 불안한 날에는 안심이, 추운 날에는 따뜻함이 되어 주었다.



엄마와 마주 앉아 곰국을 먹었다. 두레상에서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던 철딱서니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도 집집마다 곰국을 끓여대던 그 시절이 생각났던가 보다. 곰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연거푸 옛날 얘기를 하셨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들락거리던 앞집 얘기부터 곰국에 들어갔던 소뼈에 환장하던 뽀삐 얘기까지.

그 날 그렇게 곰국인지 추억인지를 오랫동안 천천히 먹었다.


어릴 적부터 엽렵하지 못한 나는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를 따라가느라 늘 바둥거렸다. 그 날 엄마와 먹은 곰국 한 그릇은 숨 가쁜 내 영혼을 잠시 쉬게 해 주었다.



맛이란 건 좋은 기억 같은 건가 보다. 잊을 수 없는 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 보다.
- 김영탁, 곰탕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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