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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Oct 23. 2021

강인한 자만 살아남는 곳, 옥탑

루프탑과 옥탑. 전자의 탑은 영어 top, 후자의 탑은 한자 탑塔이다. 신기하게 끝 자가 비슷한 이 두 단어는 뜻도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프탑 테라스가 있는 원룸’과 ‘옥상 단독 사용 가능한 옥탑방’이 주는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루프탑이라 하면 뉴욕 맨해튼에 있는 패브릭 소파에 앉아 샴페인 마시기에 알맞은 모던한 시멘트로 마감된 테라스가 떠오르고 옥탑이라 하면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에 빨래가 마르고 있는 초록색 방수페인트로 울퉁불퉁 칠해놓은 옥상이 떠오른다. 나는 바닥은 모던한 노출 시멘트였지만 루프탑이라고 부를 순 없는 옥탑방에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산 적이 있다. 


오피스텔에서 성공적인 1년간의 첫 독립생활을 마치고 더 넓은 공간이 절실했다. 다 큰 성인 둘이 한 공간을 공유하니 즐거운 만큼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우리는 오피스텔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공간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딱 2주 지속됐다. 서울에 있던 대학교 기숙사에서도 2주 살고 도망쳐 나왔고 옥탑에서도 2주 살고 도망쳐 나왔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하얀색 옥탑 집을 실제로 방문한 후 나와 J는 무조건 그 집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옥탑방 로망을 품고 살아 온 우리에게 일반 옥탑방과 다른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집은 운명처럼 느껴졌다. 서울숲과 지하철역이 걸어서 5분, 통유리로 된 한쪽 벽면은 햇살을 한껏 받아들였고 적당한 크기의 옥상 테라스에서 반려견 고봉이가 마음껏 뛰어 노는 상상, 삼겹살 파티를 하는 상상을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었지만 원체 걷는 걸 좋아하는지라 그 정도는 거뜬했다. 어차피 필요한 운동이다. 


센스 있는 젊은 주인 부부는 벽 전체를 하얗게 칠하고 곳곳에 예쁜 그림을 걸어 놨다. 화장실과 방 한 개가 임시건물처럼 컨테이너로 지어져 있던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무엇보다 월세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 방이 두 개인 옥탑은 원룸살이에 지친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옥탑은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반대할 엄마에게는 비밀로 부치고 아빠에게만 오피스텔을 떠나 옥탑으로 갈 거라고 살짝 귀띔해 놨다. 아빠도 썩 내키진 않았지만 우리의 고집을 알기에 어쩔 방도가 없었다. 계약 당일, 우리는 서울숲으로 산책을 가자며 엄마를 불러내 사실을 털어놨다. 아무런 대답 없이 우리말을 듣고 있던 엄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반드시 옥탑 집을 직접 봐야겠다며 계약 장소에 본인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집을 직접 보면 첫 오피스텔 계약 때 그랬던 것처럼 계약을 파기할 것 같아서 절대 안 된다고 막았지만 엄마는 기어코 따라왔다. -오피스텔 계약 사건을 겪고도 나와 J는 엄마 말을 들어야 무탈하다는 룰을 금세 잊었다. 


집을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던 엄마는 이미 계약금을 이체한 우리를 조용히 부르더니 이 집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했던 그대로. 우리도 예상했던 그대로 고집을 피웠다. 무조건 여기로 이사 오겠다고. 우리는 집주인을 옆에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남 앞에서 언쟁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아빠가 중재했고 우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엄마는 그날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나게 이삿짐을 싸고 누가 어느 방을 쓸 건지 정하고 가구 배치를 짜다보니 이삿날이 금방 왔다. 이사 한번 할 때마다 돈은 돈대로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쓰기에 이 집에서는 계약기간 2년을 채우고 싶었다. 청소를 하고 가구를 옮기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옥상 테라스 꾸밀 생각에 들떴다. 옥상이 바로 맞은편 건물을 마주보고 있었기에 시선 차단이 급선무였다. 우리는 아빠를 대동하고 방산시장에 가서 농사지을 때 쓰는 가림막을 잔뜩 사왔다. 뭐라고 부르는지 명칭도 모르는 천도 아니고 비닐도 아닌 것을 사와서 공사에 들어갔다. 고정하는 게 문제였다.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본 후 며칠을 매달려 겨우 가림막을 고정했다. 우리 때문에 아빠도 땡볕에서 고생을 무지하게 했다. 잡지에서 보던 것처럼 꼬마전구도 길게 달아줬다. 


설치를 완료한 기념으로 그날 저녁 옥상 테라스에서 조촐하게 수박 파티를 열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을 신나게 입에 넣으며 이것이 바로 옥탑방 로망이구나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스산한 기분이 스쳤다. 제발 내 예감이 틀리기를 기도했다. 순간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쏜살같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퀴벌레가 여긴 니들같이 약해빠진 것들이 올 곳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우린 분위기를 깨기 싫어 대수롭지 않은 척하고 넘어갔다. 속으로는 망했다고 울고 있었지만. 옥탑에서 바퀴벌레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고 우리에겐 세스코가 있었다. 


다음날 바로 세스코를 불렀다. 그런데 천하무적일줄 알았던 세스코에게도 불가능한 게 있었다. 이미 집에 들어온 벌레는 죽일 수 있지만 숲에서 날아오는 벌레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도 벌레는 계속 들어온다는 말씀이신가요?’ 제발 내가 잘못 들었길 바라며 물어봤지만 역시 답은 같았다.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 옥탑 집은 세스코에서도 포기한 집이었다. 그때 우리도 포기했어야 했는데 왜 고통의 시간만 늘렸을까. 에나멜 가죽구두 재질의 바퀴벌레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우리의 혼을 쏙 빼놨다. 옥상에도, 거실에도, 방에도, 부엌에도 있었다. 바퀴벌레와의 가장 끔찍한 경험은 화장실에서 일어났다. 


J와 나는 화장실 문을 경계로 얘기 중이었다. 양치질 중이었던 나는 화장실 문 바로 앞에 서서 J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순간 J의 시선이 내 머리 뒤쪽에 고정되었고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머리 왼쪽으로 묵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도망갈 옵션이 많았던 J는 뒤도 안돌아보고 거실로 뛰어갔고 판단력이 흐려진 나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바퀴벌레의 행방은 묘연했다. 나는 약 10초간 속옷만 입은 상태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바퀴벌레를 느끼며 1평 정도의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 트라우마가 깊이 남았다. 


이후에도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종류의 벌레는 점점 옥탑 집에 가진 얼마 남지 않은 애정마저 바짝바짝 말렸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서리마다 거미가 집을 지었고 계단 창문 방충망에는 장수풍뎅이가 자리 잡았다. 우리 집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유리문에는 천연기념물 같은 생전 처음 보는 벌레가 자신의 신기한 생김새를 자랑하듯 몸을 활짝 펴고 붙어있었다. 덕분에 꿈속의 로망을 실현해줄 것 같던 옥상 테라스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매일 계단을 오르는 것부터 집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가 담력 체험이었다. 


온실 같다고 좋아하던 한쪽 면의 통유리에서는 비가 줄줄 샜다. 한여름의 태양열로 한껏 달아오른 집안 공기에 숨도 편히 못 쉴 지경이었다. 여름이 이 정도면 겨울은 어떨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원래부터 잘 들어맞지 않았던 현관문 밑에는 쥐구멍이라고 해도 될 만큼 쥐들이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나있었다. 이 쥐구멍이 옥탑방을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옥탑은 이렇게 눈부셨다.



입주 후 자잘한 문제와 수리로 집주인 내외를 몇 번 소환했는데 남편 집주인 입장에서 까다로워 보이는 세입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현관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아 몇 번이고 힘을 줬다 뺐다 들었다 놨다 해야 하고 거기다 쥐구멍으로 벌레와 외풍까지 들어오니 문을 교체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문 교체를 요구하는 우리에게 남편 집주인은 이 정도 월세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지 않냐며 얼굴을 붉혔다. 난 그 정도 월세면 기본적인 환경은 갖춰진 곳이어야 옳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우린 현관문에 구멍이 난 집에 살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다행히 아내 분이 중재했고 우리는 보증금을 그대로 돌려받고 2주 만에 벌레 천국에서 탈출했다. 


난 여리여리하다 못해 물렁물렁한 인간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로망은 물렁한 자들을 위한 것이며 현실은 바퀴벌레의 애나멜 재질 갑옷보다도 단단하고 튼튼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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